도시산책자 계봉 씨의 평범한 하루
아들의 전화가 나의 오후를 온통 환하게 만들어주었다 본문
교회에 가질 않았다. 어머니께는 컨디션이 안 좋다고 말을 했지만 사실 지난주 퀴어 축제와 차별금지법에 대한 교회의 입장을 듣고 난 후 정이 떨어져서 가고 싶지 않았다는 것이 솔직한 이유다. 그래도 어머니께 미안해서 청소도 하고 반찬도 만들어 놓고 빨래도 해서 널며 부산을 떨고 있을 때 아들에게 전화가 왔다. 사실 대단한 걸 기대하지는 않았지만 내심 ‘그래도 애비 생일인데 전화 한 통 없네.’하는 일말의 서운함까지 없었던 건 아니다. 아들은 전화를 걸어와 “아빠, 생일 축하해”하며 “갖고 싶은 거 없어?”라고 물어왔다. 사춘기 이후 단 한 번도 자발적으로 나의 생일에 축하인사를 한다거나 선물을 한 적이 없던 아들이었기 때문에 놀라움과 감동이 뿌듯하게 밀려왔다. 나는 “특별히 필요한 건 없는데 정 주고 싶으면 현금으로 줘. 얼마나 줄 건데.” 했고, 아들은 “뭐 그냥 적당히”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자신의 객지 생활과 직장 생활의 어려움을 비롯해서 속말을 풀어놓기 시작했다. 아들은 자신의 미래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직장 생활은 이미 적응이 되었고 일도 재미있다고 했다. 다만 법원 근처에 젊은이가 쉴 수 있는 공간도 없고 모든 것이 낯설기 때문에 퇴근 후의 시간이 너무 길고 지루하고 재미없다는 말을 했다. 그리고 자신의 미래에 대한 생각을 많이 했다며 이것저것 구상하고 있는 계획들을 털어놓았다. 아직 대학교도 졸업하지 않은 상태에서 임용되어 직장생활을 하고 있는 상황이라 나는 아들이 요즘 아이들 특유의 다소 들뜬 생각이나 욜로[You only live once!]족의 마인드를 가지고 있을 거라 지레짐작을 했는데 그것이 결코 아니었다. 오히려 어떤 면에서는 나보다 더욱 치밀한 미래에 대한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오랜만에 아비다운 아비가 되어 성심성의껏 아들의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그렇게 아들과 한 시간이 넘게 이야기를 나눴다. 아마도 그 아이의 삶에도 나의 삶에도 오늘 같이 길게 대화를 한 것은 처음이었을 것이다. 전화를 끊고 나자 문득 아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아이가 가장 외롭고 힘들 때 나는 위로하고 도와주기는커녕 방관하고 방치했다. 나에게 퉁명스러운 것은 철이 안 난 아들의 성정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고생 없이 컸기 때문에 부족한 걸 모르는 철부지의 툴툴거림이라고 생각했다. 경제적으로 넉넉하게 해주면 애비의 할 일을 다 한 것이라고 착각했던 것이다. 부끄러웠다. 내가 그런 편벽한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을 때도 아들은 착실하게 스스로 성장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대견한 마음 한 편으로 나 자신이 한 없이 부끄러웠다. 아이를 위해서 걱정하고 챙겨준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오로지 할머니일 뿐이다.
이번 명절에 올라오면 이틀 동안 머물 수 있다고 하니 술 한 잔 나누며 많은 이야기를 나눠야겠다. 아들의 전화 한 통이 오후를 온통 환하게 만들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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