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산책자 계봉 씨의 평범한 하루
아, 비껴가는 사랑의 낯익은 슬픔이여 - 신경숙, 『깊은 슬픔』을 읽고 본문
한 블로그 친구의 부탁을 받고, 오래전에 읽었던 <깊은 슬픔>에 대한 '감상'을 올려봅니다.
신경숙의 소설은 확실히 매력적이다. 문체도 내용도 독자들을 끌어들이는 확실한 '감염력'이 있는데, 그 감염력(흡입력 혹은 매력)의 정체를 "인간 존재가 숙명적으로 가지는 '결핍'을 향한 간절한 발신음"에서 찾은 김훈 선생의 견해에 나는 전적으로 공감한다. '숙명적 결핍'의 존재들인 인간들 사이의 교감이, 그녀가 쓰는 소설의 내용과 형식을 지탱해 주는 주된 줄기라는 것이다. 따라서 <결핍 인자>를 유전자 속에 이미 가지고 있는 독자들은(인간인 이상 이건 숙명이다.) 그녀의 소설에 '숙명적으로' 공감할 수밖에 없고, 거기서 정서적 동질감들이 만들어지며, 결국 그녀의 소설에 '감염'되고 마는 것이다.
그녀의 첫 장편소설 <깊은 슬픔>은 한 여자(은서)와, 그녀가 짧은 생애 동안 만난 사람('완'과 '세'라는 두 남자)들의 이야기를 그린 소설이다. 세 사람은 사랑(이라고 확신하지만, 결국 착각일 수도 있는)이라는 감정으로 결속되어 관계를 형성해 나가지만, 제목에서 이미 암시되고 있듯 결국 절망하게 된다. 어떻게 보면 매우 통속적이고 신파적이라고 할 수 있는 '엇갈리는 사랑 이야기'에, 세련되고도 몽환적인 서정성과 아름다움을 부여하는 것은, 철저하게 신경숙이 가진 '문체의 힘'에서 비롯된다고 나는 생각한다. 사실.. 나는 문체주의자들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녀가 보이는 서술의 치밀함과, 소설 속 인물에 대한 핍진한 애정이나 감정이입은 누구나가 인정할 수밖에 없는, 소설가로서의 큰 미덕이 아닐 수 없다.
사랑없이는 삶도 없는 여자 <은서>, 사랑이 변하는 것을 견딜 수 없어했던 남자 <세>, 소위 '나쁜 남자'의 표본 <완>, 이 세 사람은 같은 마을에 사는 친구들로서, 그들은 석류나무 아래 돗자리를 펴고 함께 누워 낮잠을 잘만큼 친한 사이였다. 서로가 서로의 팔과 발을 베고 누워 편안한 잠을 잘 수 있었던 그런 사이... 그런 그들 사이에 아직은 '사랑'이란 감정이 틈입할 여지는 없었다. 막연한 연민과 그리움이 그들을 연결해 주는 매개였을 뿐... 그러나 사실... 그들은 몰랐을 뿐이었다. 이미 '사랑'은 그들 맘 속에 실한 씨앗으로 잉태되어 자라고 있었던 것을.... 그런데 문제는 그 사랑이 서로에게 환희와 성취감을 가져다 주는 사랑이 아니라, 엇갈리는 사랑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세 사람의 사랑은 일종의 '시소게임'처럼 기울고, 흔들리고, 끝내는 아프고, 절망한다. 결국, <깊은 슬픔>의 줄거리를 요약하면 정말 단순한 이야기가 된다. 소꿉친구인 은서와 완, 세의 삼각관계. '완'을 사랑하던 '은서'는 '완'에게 배신당해 버려지고, 그녀를 사랑하던 '세'에게로 가 그('세')를 사랑하게 되지만, 한때 '완'을 사랑했던 '은서'를 믿지 못한 '세'는 자신을 사랑한다는 그녀에게서 등을 돌리는.... 결국 자신이 사랑하는 동안에는 그 누구에게도 사랑받지 못한 한 여자의 이야기가 <깊은 슬픔>의 줄거리인 것이다.
어디서 많이 본듯한 이러한 삼각관계와 엇갈리는 사랑, 그리고 절망과 상실의 깊은 늪에서 고통스러워하다가 결국 죽음으로 그것들을 정리하고 마는 캐릭터(은서)의 등장... 난 이런 류의 소설을 좋아하지 않는다. 아..오해 없기를... 문학적 완성도는 소재로부터 비롯되는 게 아니라, (아무리 진부한 소재라 하더라도) 그 소재를 어떻게 요리(?)하는가에 달려 있다는 걸 모르는 것은 아니다. 신경숙은 확실히 '소재적 진부함'을 그녀의 섬세한 감수성과 인간 심리에 대한 치밀한 분석과 묘사로서 극복하고 있다. 즉, 나의 거친 단순화와 뭉뚱그림에도 불구하고, 소설의 실재 내용은 훨씬 복잡하고, 인물의 심리 묘사도 섬세하고, 치밀하다는 것은 이미 인정한 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작품을 '소설'로서 읽고 싶지 않았다. 이렇듯 (인물 간의 갈등 구조 및 설정이) 진부한 사랑이야기는 텔레비전 아침드라마에서 허다하게 목격할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닌가?
그러나 만약, 서두에서도 말했지만, 인간의 숙명적 결핍이라는 철학적 화두를 바탕에 깔고, 자신의 사랑을 되돌아보고자 하는 독자들이 있다면, 이 소설 속 인물들의 얽히고 설킨 사랑이야기는 나름대로 의미 있는 깨달음을 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자신의 사랑이 너무도 힘겨운 독자들은 아마도 쉽사리 감정이입이 이루어질 것이고, 대리만족, 혹은 대리분노를 표출함으로써 종국에는 정서상의 카타르시스를 경험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말이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상실의 시대>와 언뜻 비슷한 분위기의 소설인 것 같지만, 사실은 확실히 구별되는 뭔가가 있다는 걸 알게 될 것이다. 사실 두 소설을 비교 분석해 보는 것도 재미있는 작업이 될 것 같다.^^
각설하고,
진정으로, 주는 쪽과 받는 쪽 모두 행복해질 수 있는 사랑이란 꿈만 같은 것일까?
인간은 숙명적으로 고통스런 사랑을 경험해야 하는 천형을 타고났다는 말인가?
나는 아직도 모르겠다. 모르지만... 적어도 나는 이런 사랑을 하고 싶지는 않다. 물론 '숙명적 결핍'이란 전제에서 출발한다면, 그 사랑조차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것도 아니겠지만....
나는 아직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것은 아닐까?
<깊은 슬픔>을 읽고, 가슴이 먹먹해지는 '깊은 절망'을 경험했던 기억이 새삼스럽게 떠오른다.
그로테스크한 섬세와 서정, 그럼에도 불구하고 낯익은 슬픔...
이 '역설'적 표현이 내가 <깊은 슬픔>을 읽고 느낀 최후의 감정을 대변한다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바라건대, 이 소설의 에필로그('불행으로 그 시대를 견뎠다')가 가슴 아픈 사랑을 꾸려가는 이 땅의 모든 연인들에게, 역설적 희망의 메시지로 읽혀질 수 있기를..... [달빛사랑]
*책 속에서 나를 격동시킨 혹은 절망하게 만든 문장 혹은 장면들....
"무서워." 완은 자신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은 은서를 내려다보다가 그녀의 머리에 손을 내려놓았다. "뭐가 무서워?" "모든 것이." 은서는 눈물이 그렁해졌다. 그냥 다 무서워, 오래된 것들이... 네게 빠져 있는 내 마음이, 저 별이, 기억해야 하는 어린 시절이, 함께 있어도 이렇게 외로운 마음이, 네가 세상에 혼자인 듯이 그러고 앉아있으면 나는 발이고 더듬이고 다 잘린 것 같아. 무서워. (128쪽) |
"나에게 잘해주지 마." "......." 은서는 쓸쓸히 웃었다. 그래, 나에게 잘해주지 마. 내가 얼마나 내 생각만 하는지 알아? 너에게 조금도 신경을 못 쓰면서 네가 나를 떠날 거라는 생각은 또 안 하지. 언제나 네가 내 곁에 있을 거라고 생각해. 너는 모르지, 저 사람이 나를 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 그 생각은 묘하게도 마음을 움직여. 거기에 매달리고 싶게 해. (178쪽) |
세에게서 들은 아름답고 따뜻한 말을 완에게 간절히 들려주고 있는 것, 그것만이 아니었다. 은서는 자신이 자신도 모르게 완에게서 받은 서러움이나 야속함 같은 걸 그대로 세에게 쏟아내고 있다는 걸 어느 날 또 깨달았다. 일부러 그러려해서 그러는 게 아니건만 완에게 주고싶은 간절한 것들은 세가 자신에게 해주었던 것들이고, 세에게 자신도 모르게 툭툭 내뱉게 되는 말과 행동들은 또 완이 자신에게 했던 것과 닮아있음을 은서는 어느날 외롭게 느꼈다. (188쪽) |
단 한번도 세가 자신에게서 멀어질 수도 있다는 생각을 은서는 해본 적이 없다. 언제는 세는 거기 있었고, 거기 있을 것이라고.. 왜 그렇게 확신을 갖고 있었을까? (313쪽) |
나, 인생에 대해 너무 욕심을 냈구나. 한 가지 것에 마음 붙이고 그 속으로 깊게 들어가 살고 있었지. 그것에 의해 보호받고 싶었지. 내 마음이 가는 저이와 내가 한 사람이라고 느끼며 살고싶었어. 늘 그러지 못해서 무서웠다. 그 무서움을 디디며 그래도 날들을 보낼 수 있었던 건 그럴 수 있을 거란 믿음이 있어서였지. 하지만 이제 알겠어. 그건 내가 인생에 너무 욕심을 내 거였다. 이 깨달음은 내게 아무런 힘을 주질 않는구나. 내가 그를 볼 때, 그는 다른 그를 보고, 근느 또 다른 그를 보는, 그런 비껴감의 슬픔을 반복하며 저 봄에 발을 디딜 힘이 내겐 없구나. 그것들이 내게 남긴 공허와 망상과 환청과 의심으로는 버틸 힘이 없어. (578쪽) |
너는 너 이외의 다른 것에 닿으려고 하지 말아라. 오로지 너에게로 가는 일에 길을 내렴. 큰 길로 못 가면 작은 길로. 그것도 안 되면 그 밑으로라도 가서 너를 믿고 살거라. 누군가를 사랑한다 해도 그가 떠나기를 원하면 손을 놓아주렴. 떠났다가 다시 돌아오는 것, 그것을 받아들여. 돌아오지 않으면 그건 처음부터 너의 것이 아니었다고 잊어버리며 살거라. (580쪽) |
나, 그들을 만나 불행했다. 그리고 그 불행으로 그 시절을 견뎠다.(581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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