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산책자 계봉 씨의 평범한 하루
선물 같은 토요일 (4-27-토, 뿌연 햇빛) 본문
아무것도 안 하고 종일 쉬었다. 연이은 술자리의 후유증은 없었다. 확실히 1차로 소주 마신 후 2차로 맥주 마셨을 때보다 막걸리를 마시니 숙취가 덜하다. 나에게는 소주보다 막걸리가 맞는 술인 모양이다. 허참, 혈당을 높이는 술이 몸에 맞다니, 고민이 아닐 수 없다. 하긴 그 어떤 술이든 과도하게 마셔도 탈 나지 않는 술은 없다. 개운하고 산뜻한 마음으로 시장도 다녀오고 침구도 정리하고 집안 청소도 했다. 오후에는 운동하고 낮잠 자고 후배들의 전화를 받아주었다. 장은 저녁 먹을 때 전화해 일단 끊었는데, 설거지할 때쯤 다시 전화해 나의 40여 분을 강탈해 갔다.
혼자 막걸리를 마시는 중이라고 했다. 술기운에 전화를 한 모양이었다. 그는 아는 여성 화가로부터 자신의 여동생을 사귀어 보지 않겠느냐는 제안을 받았다고 말했고, 또 얼마 전에 만난 여성 시인 한 명이 자신에게 장문의 시 창작 팁을 메일로 보내주었다는 이야기도 했으며, 자신만이 쓸 수 있는 시 세계를 찾아야겠다는, 어찌 보면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와 지극히 당연한 이야기를 천연덕스럽게 40분간이나 이어갔다. 맘이 약한 나는 때로 묻고 때로 대답해 주며 그 시간을 '견뎠다'. 내가 그만큼 편하기 때문이겠지만, 나는 다소 피곤함을 느낀다. 전화보다는 문자 메시지를 선호하는 나로서는 누군가로부터 전화가 오면, 벨이 울리는 그 짧은 사이에도 숱한 생각이 오간다. 나와 같은 내향형 인간들은 전화가 버겁다. 결국 내쪽에서 "그만 끊어라. 형, 운동해야 해" 하고 대화를 종료했다.
밤에는 넷플릭스 영화 두 편을 보았다. 잭 스나이더 감독의 최신작('레벨 문' 파트 1~2)들인데, 팝콘 무비로서는 그럭저럭 볼만했는데, 평론가들과 까다로운 감상자들에게는 만족스럽지 못했나 보다. 무척 혹평을 받고 있다. 스토리도 빈약하고 개연성도 없으며 잭 스나이더 감독의 트레이드 마크인 잦은 슬로 화면의 사용도 진부해 보이긴 했다. 쉽게 말해 그동안 나왔던 다양한 영화들(서부영화, 닌자영화, 스타워즈 등등)에서 모티브를 가져다가 짜깁기한, 그야말로 무성의하고 게으른 영화였다. 아마도 대자본이자 국제적 네트워크를 확보하고 있는 OTT 넷플릭스에서 제작비용 걱정하지 말라며 대자본을 내주었기 때문일까? 다시 말해 지나치게 넉넉하다 보니 긴장감이 떨어진 걸까. 아니 그렇다면 오히려 더 잘 만들었어야지. 아무튼 평론가와 관객의 혹평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다만, 잭 스나이더라는 이름을 잊고, 눈높이와 기대치를 대폭 낮추고 보면 그럭저럭 눈요기는 되는 영화였다.
제고 산우회 톡방이 불이 났다. 내일 제고총동문산우회에서 원거리 산행을 떠나는 모양이다. 고속버스 탑승 정거장과 준비물, 참석 인원을 확인하는 문자들이 끝없이 올라왔다. 그것들을 지켜보며 왜 나는 그들과 함께하지 못한 것일까 잠시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 이내 결론을 내렸다. 그건 바로 참석자 대부분이 부부동반이었기 때문이다. 총동문산행은 기차를 통으로 빌리기도 하고 고속버스를 대절해서 다녀오기도 하는데, 일단 저렴하게 부부가 소풍갔다 올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고, 평소에 속만 썩이던 남편이 '합법적으로 술에 취해도' 어느 정도 점수 딸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해서 매번 부부 참석자가 많다. 그리고 나는 부부동반 여행에 꼽사리 끼는 것 같은 느낌이라 가기가 싫은 거고.... 에고, 도대체 왜 이렇게 살면서 점점 더 소심해지는 건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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