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성은 힘이 세다 (4-29-화, 맑음)

타성은 생각보다 힘이 세다. 힘센 타성을 이겨보려고, 결심한 걸 절대 잊지 말자는 결심까지 한 적 있다. 그러나 자주 진다. 오늘도 결심과는 달리 점심에는 라면, 저녁에는 냉면을 먹었다. 술 마신 다음날의 루틴이지만, 그만큼 몸에 밴 습관(타성)은 벗어나기 힘들다. 나쁜 걸 알면서도 떨쳐내지 못하는 건 의지가 약해서겠지. 근데 그걸 누가 모르나.
그렇다고 타성과의 싸움에서 나의 의지가 늘 패배하는 건 아니다. 그러니까 '이겨하지' 하고 결심하는 거지, 맨날 패배하면 무슨 맛에 결심하겠나.
11시쯤 유 박사가 전화해 "형, 해장해야지" 했다. 낮술 마시자는 것이다. 당연히 거절했다. 그는 곁을 주면 너무 자주 연락한다. 외롭기 때문에 그렇겠지만, 부담스럽다. 그나마 오늘은 밝은 목소리로 대화를 주고받다 전화를 끊었다. 다행이다. 신경질 내며 끊을 때도 부지기수다. 그가 이미 많이 취한 상태에서 내게 전화를 걸어 다짜고짜 술 마시러 나오라고 억지를 부릴 때다. 당연히 그는 술이 깨면 기억하지 못했다.
5시쯤에는 그의 아내 윤의 전화를 받았다. "선생님, 혹시 남편하고 같이 있어요?" 그녀는 물었다. 아니라고 했더니, 한숨을 푹 쉬며 "어딘지 알아야 데리러 가지요. 술이 떡이 된 것 같은데"라고 했다. 전화를 끊고 나서, 혹시 내가 유를 만났어야 옳았던 건가 잠시 생각했다. 그가 인사불성이 되도록 술을 마신 게 꼭 내 탓인 거 같았다. 그래서 윤에게 괜스레 미안했다. 이런 경우가 한두 번이 아니다. 술이 깼을 때 유 박사는 매우 유순하고 점잖다. 그에게도 타성의 힘은 무척 강력한 모양이다. 몹쓸 술버릇을 저주하며 얼마나 자신의 머리를 쥐어뜯었을 것인가. 그런 그가 부담스러우면서도 한편으로 짠한 연민이 드는 것은 아마도 그와 내가 많이 닮았기 때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