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평범한 봄날 (4-10-목, 비 오고 갬)
비가 잠깐 왔으나 이내 그쳤다. 시인의 방에도 봄은 왔는데, 정작 있어야 할 시는 없었다. 시가 없는 시간이 너무 길었다. 한때는 내란에 준하는 극단적 정치 상황과 윤의 몰염치한 행보가 내 문학적 게으름의 원인이라고 자기 세뇌했는데, 사실 그건 치사한 변명일 뿐이었다. 그래도 봄은 왔고 꽃은 피었다. 비와 바람이 꽃송이를 떨어뜨려도 연일 꽃들은 팝콘처럼 터졌다. 그리고 아직도 내란은 끝나지 않았다. 윤은 용산 집무실을 나와 사저로 돌아갔다. 그 과정에서 다시 또 말도 안 되는 궤변을 늘어놓긴 했지만, 그래서 더욱 한심하고 코미디 같았다. 마지막까지 팔푼이 짓을 하다니, 그런 점에서는 일관성 있는 사람이다. 저런 팔푼이가 나라를 대표했다니, 국가의 품격은 지금 만신창이가 되었다. 빨리 감옥으로 보내는 게 답이다. 당분간 대선판이 벌어져 말 같지 않은 말들의 난무를 또 봐야 할 듯싶다. 그래도 멍청이를 축출하고 새판을 짜는 모양새이니 피곤해도 참아야겠지.
저녁에는 은준이 전화해서 “형네 동네 동태탕 집에서 저녁 먹으면서 소주 한잔하실래요?” 했다. 뭔가 작업을 시작하려고 할 때마다 징크스처럼 은준의 전화를 받게 된다. 때마침 저녁 시간이었고 나도 식사 전이라서 집 앞에서 만났다. 식당에 들어가 그는 알탕을 나는 동태탕을 먹었다. 그리고 바로 옆 실내포장마차 ‘만월’에 들어가 오징어 안주로 2차를 했고, 스낵과 아이스크림을 사 들고 우리 집에 와서 3차를 했다. 요즘 소주를 마시면 최소 3병 이상은 마신다. 과음이다. 이전에 비해 자주 마시진 않지만, 그래도 소주 3병은 과하다. 하긴 워낙 알코올 도수가 낮아져 술이 물처럼 순해지긴 했다. 그를 만나면 주로 신앙과 문학, 그중에서도 시 얘기를 깊게 나눈다. 뒤늦게 시인이 되기 위해 노력 중인데, 명민한 친구라서 조만간 좋은 결과가 나타나리라고 본다. 그는 집을 나서며 “형, 집에 가서 냉면 끓여 먹으려고 하는데 오이가 없네요. 형네 오이 있으면 하나만 주세요” 했다. 어제 장 봐 온 걸 어찌 알았담. 냉장고에서 오이 하나를 꺼내 티슈로 감싼 후 가방에 넣어주었다.
“늘 고마워요, 형” 하며 꾸벅 인사하고 그가 돌아간 후, 나는 식탁을 치우고 설거지를 마친 후,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다. 늦은 밤 아이스크림을 먹는 건 독약을 먹는 것과 다름없는데, 나는 그 무모한 일을 겁도 없이 하고 있다. 하지만 너무 행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