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망에 관한 잡생각들 (4-14-일, 맑음)

어제도 예외 없이 과음했다. 많이 걸어서 그런지 취기는 없었지만, 소주 1병 반, 맥주 5잔을 마셨으니, 대단한 주당들에게는 그저 그런 양일 수도 있겠지만, 보통 사람에게는 적지 않은 양이다. (나의 주량이 보통 사람의 그것과 비슷하다고 하면 비웃으려나) 사실 나의 주량은 고무줄 주량이다. 나만 그런 건 아니겠지만, 컨디션에 따라 그때그때 다르다. 당연히 어제는 컨디션이 그리 좋은 편은 아니었다. 전날, 그러니까 그저께도 과음했기 때문이다.
냉면 먹으러 갈 때만 해도 술 마실 생각은 전혀 없었다. 냉면집에서 ‘선주후면’을 주장하며 장(張)이 덮어놓고 (아니다. ‘한잔하실 거지요?’ 하고 묻기는 했다. 사실 질문이라기보다는 확인에 가깝긴 했지만) 소주를 시키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잔을 받았던 것인데, (후배 이병국 시인도 마찬가지였다) 그것이 3차까지 이어지는 한여름 밤의 술자리, 그 마중물 역할을 할 줄이야.
술 마신 다음 날의 루틴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렇다. 오늘 나는 라면을 먹었고, 아이스크림을 먹었고, 순대국밥을 먹었다. 운동(실내 자전거)으로 상쇄한 열량은 700㎈가 채 안 된다. 악순환이다. 이런 날은 꼭 뭔가 크게 손해 본 것 같아 기분이 개운하지 않다. (실제로 손해 본 건가?) 다만 속이 편하고 머리가 아프지 않아 다행이긴 했지만.
본격적으로 여름이 시작되었다. 예년보다 여름의 보폭이 무척 빠르다. 빨리 찾아와서 늦게 가려는 모양이다. 나로서는 기함할 일이지만, 이와 같은(‘4월에 만나는 여름’) 기후 상황은 지구 환경이 그만큼 나빠진 결과일 것이다. 에어컨으로 이곳은 또 얼마나 더 더워질 것인지, 벌써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욕망을 줄이면 좀 더 편안한 삶을 살 수 있을까? 덜 덥게 혹은 덜 춥게 살고 싶은 욕망, 더 많이 벌고 싶은 욕망, 사랑을 성취하고 싶은 욕망, 맛있는 거 먹고 싶은 욕망, 좋은 옷을 입고 싶은 욕망, 멋진 집에서 살고 싶은 욕망, 멋진 차를 갖고 싶은 욕망, 인정받고 싶은 욕망, 좋은 시를 쓰고 싶은 욕망…… 그런데 좋은 욕망과 나쁜 욕망을 구분하는 잣대는 무엇이지? 이타적인가 이기적인가가 기준일까? 혹은 남에게 피해를 주는가 여부? 사실 욕망이 없으면 성취동기도 없는 거 아닌가? 또 이타적 욕망도 있을 수 있잖은가?
예를 들어 평생 타인을 위해 봉사하며 살고 싶은 욕망, 글쎄, 이럴 때는 욕망이라고 하지 않고 소망이라고 해야 하나? 딱히 이타적이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욕망이라면 진취적일 수 있는 거 아닌가? 상대보다 더욱 탁월한 능력으로 인해 그룹에서 인정받고 싶은 욕망은 나쁜 욕망이 아니잖은가? 그런데 왜 성현들은 하나같이 무조건 욕망을 버리라고 강변했을까. 쉽게 자제할 수 없는 욕망의 연쇄, 욕망의 무한 확장과 같은 욕망의 비인간적 속성 때문일까? 나는 왜 ‘나는 욕망한다. 고로 존재한다’라고 말하고 싶은 거지? 욕망을 버리라고? 욕망이 빠져나간 자리에 무엇이 들어찰까? 고즈넉한 마음의 여유가 과연 욕망의 빈자리를 채워줄까? 이를테면 사랑하는 사람에 관한 집착과 상대의 사랑을 온전히 내 몫으로만 하고 싶은 에로스적 욕망을 버리면 마음에 남은 건 무엇일까? 욕망을 버리려고 애써 노력하는 것도 또 다른 욕망 아닌가? 그렇다면 물 흐르듯 사는 삶이란 어떤 삶이지? 자연을 닮은 삶? 무위자연? 자연에는 욕망이 없는가? 짐승과 짐승의 이빨과 발톱이 부딪치고, 더 좋은 짝을 찾아 교미하는 것도 욕망 아닌가? 짐승은 본래 그렇게 본능대로 살도록 타고났기 때문이라고? 인간 역시 욕망을 타고난 건 아닌가? 타고난 욕망을 도저한 의지로 억누르며 살라는 가르침이 무어 그리 대단한 가르침인 거지? 아, 모르겠다. 난 지금 굶주린 짐승 혹은 새끼를 보살펴야 하는 어미 늑대의 심정으로 갈구하는 욕망이 세 개가 있다. 그중 두 개는 노력 여하에 따라 이룰 수 있고, 나머지 하나는 생전에 이루기 요원한 것이다. 셋 다 포기하고 싶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