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은 우리를 겸손하게 하지요 (1-23-화, 맑음)

체감온도 영하 20도, 맹렬하게 추운 날씨다. 보일러 가동을 알리는 불빛이 종일 꺼질 줄을 몰랐다. 방안은 미안할 정도로 따뜻했지만,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겨울볕이 처음에는 모락모락 김이 오르다가 어느 순간 바늘처럼 꽁꽁 얼어붙어 책상 위로 우수수 떨어질 것만 같다. 엊그젠가 쌀벌레 나방 한 마리 안쪽 창문과 바깥 창문 사이에 붙어 꼬물대고 있었는데, 추위를 피할 잠자리를 잘 찾아갔는지 궁금하다.
저녁 준비 중에 로미의 전화를 받았다. 액정에 로미의 이름이 뜨는 순간 '아, 혁재와 함께 술집에 있군' 하고 생각했다. 예상대로 혁재와 로미는 갈매기에서 술 마시고 있었다. 내 퇴근 시간에 맞춰 전화한 모양인데, 오늘 나는 출근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갈까 말까 잠깐 망설였다. 하지만 혁재가 보고 싶어 결국 저녁 준비하다 말고 집을 나섰다. 날씨가 추워 택시 타고 가려고 '카카오택시'를 검색했더니 15분 후에나 도착 예정이었다. 포기하고 그냥 나가서 잡기로 했는데, 다행히 빈 차가 금방 도착했다. 머리가 하얀 택시 기사는 무척 친절했다. 어린 시절 겪었던 겨울 추위 이야기를 함께했는데, 나이를 묻진 않았지만, 많은 부분에서 나의 경험과 일치하는 걸로 보아, 아마도 내 또래이거나 서너 살 많은 분이셨을 거라 짐작되었다.
갈매기에 도착하니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생각보다 손님이 많았다. 늘 앉는 자리에 혁재와 로미가 앉아 있었고, 정웅이도 일행들과 술 마시고 있었다. 매기 형과 형수도 표정이 밝아 보였다. 형수는 나를 보고 "이제 새해도 됐으니 연애도 좀 하셔야지요" 하며 웃었다. 그녀는 왜 모를까. 나는 잠시도 연애를 쉬어 본 적이 없는데..... 물론 맘속의 연애이거나 썸 타는 단계지만, 누군가를 좋아하는 마음은 늘 품고 살아왔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그동안 자신이 소개해 준 여성에게 실수한 것 때문에 소원한 관계였던 로미가 큰맘 먹고 '상훈'이와 만나겠다고 해서 부랴부랴 상훈에게 연락했다. 사과할 기회를 찾고 있던 상훈이는 반색했다. 말 나온 김에 목요일 우리 동네서 만나기로 했다. 애초에 인천집에서 만나려고 했는데, 상훈이가 로미를 배려한다며 부평이나 만수동에서 보자고 했고, 결국 우리 동네에서 보게 된 것이다. 모든 어긋난 관계가 시간이 지난다고 해결되는 건 아니다. 로미의 배려와 나의 중재가 맞아 떨어졌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아무튼 가벼운 마음으로 내일 출근도 해야하고, 어차피 목요일에 만나 술 마실 일이 있으므로 소주 두 병만 마시고 일찍 일어났다. 전철역까지 걸어오는데, 날이 하도 추으니까 '오늘은 그냥 택시 타고 갈까' 하는 유혹이 생겼지만, 꾹 참고 걸어와 전철 타고 귀가했다. 새로운 단골집인 '인쌩맥주' 집에 손님이 가득했다. 젊은이들은 추위도 안 타는 모양이다. 날이 추워 그런가, 거리에서 스쳐가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고개를 15도 정도 숙이고 다닌다. 확실히 겨울은 우리를 겸손하게 만든다.
집에 도착했을 때, 제주도 여행 중인 J 누나로부터"사랑해요 계봉 씨.ㅋㅋ 여기 제주도예요. 친구들과 소주 마셔요. 나 취했어요" 하는 문자가 왔다. 살짝 설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