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시집을 받다 (12-15-금, 종일 비)

달빛사랑 2023. 12. 15. 20:11

 

'삶의 볕과 그늘을 이토록 쉬운 단어와 담백한 표현만으로도 생생하고 절실하게 노래하는 시인이라니. 패배와 절망의 상황을 전복하여 승리를 위한 새로운 희망을 조형하는 시인, 가끔 일상의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까라지고 있는 나를 홀리고, 정신 차리라며 등짝을 후려치는 무녀의 공수 같은 시', 나에게 김해자 시인과 그녀의 시는 그렇게 다가왔습니다. 이번 시들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시집 말미 '시인의 말'을 보면 그녀가 세상과 시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잘 드러나 있어 소개합니다.❚그나저나 서명을 어찌 이리 예쁘게도 꾸며 보내셨을까요. 매번 고맙습니다. 늘 지금처럼 건강, 건필하시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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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는 아무도 말을 가로채지 않는 대화 같다. 글자에 수많은 얼굴이 비치는 종이거울 같기도 하다. 겨울 뒤란에서 잠자고 있던 이름들이 불려 나올 때마다 다시 태어나는 종이거울 안에서, 나는 나무이자 벌목꾼이고 사슴이자 사냥꾼이었다.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에 공습이 이어지고, 세계가 극단적인 비대칭을 항해 폭주하고 있는 지금, 나는 맞아 죽은 자이자 때려눕힌 자이고 독재자이자 야만적인 인류사다.| 절망해야 할 이유가 아흔이라면 희망할 근거는 서너 조각에 불과했다. 그래서 썼는지도 모른다. 더듬거리며. 신음과 비명이 터져 나오는 시절에 시라니? 그래도 썼다.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내가 아닌 것이 떨어져 나가고 바로 너인 것이 내가 될 때까지. 이만큼이라도 걸어오게 한 이웃들과 동지들과 스승들께 감사드린다.”❚김해자, 『니들의 시간』, 창비, 2023, ‘시인의 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