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문 (11-23-목, 잔뜩 흐림)

단골 채소가게로 오이 사러 갔다가 허탕 쳤다. 오이만 얼른 사다 놓고 출근해 일을 보다가 점심시간에 맞춰 연수동 적십자병원장례식장에 조문하러 갈 생각이었다. 첫 계획이 무산되자 선택장애 증상이 도지기 시작했다. 버스 정거장과 지하철역 사이에서 서성거리며, 그냥 이대로 출근해 버릴까, 근처 마트에 들러 '기어이' 오이를 사다 놓고 출근할까를 고민하다가 결국 집에 들러 옷 갈아입고 나왔다. 빈소에 어울리지 않는 빨간색 옷을 입고 있었기 때문이다. 애초부터 출근을 고민하며 서성거릴 일이 아니었다. 요즘 매사가 이렇다. 오이는 결국 퇴근길에 구매했다.
친구 모친은 요양원에서 1년쯤 누워계시다가 운명했다. 위독하다는 연락을 받고 요양원을 찾았을 때는 이미 운명한 뒤였으므로 자식들은 임종을 보지 못했다. 임종을 보지 못한 건 나도 마찬가지다. 주무시다 그렇게 가실 줄을 몰랐으니, 엄마가 서운하게 생각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아무튼 친구 모친도 역시 요양원에서 생을 마감했다. 울엄마처럼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집에서 운명하는 노인은 찾기 힘들다. 그토록 가기 싫어했던 요양원에 가지 않고 집에서 잠자듯 하늘에 드셨으니, 그것은 엄마에게도 좋은 일이었고, 마지막 시간까지 엄마와 함께 한 나에게도 좋은 일이었다. 나에게는 좋은 일 정도가 아니라 엄마가 내게 남긴 최후의 배려였다고 나는 생각한다. 자식들은 모두 공감할 것이다.
내가 빈소의 첫 방문객이었다. 두 시가 넘어설 때까지도 조문객이 없어 친구와 오래 이야기하다 사무실로 돌아왔다. 돌아오는 길, H가 사는 집 근처를 지나면서 연락을 할까 하다가 근무 시간일 것 같아 그만두었다. 저녁이 되면서 하늘은 점점 내려앉고 있었고 날은 더욱 을씨년스러워졌다. 예보를 확인하니 내가 사는 동네에는 비 소식은 없었다. 사무실에 도착해 초콜릿 두 알을 먹고 믹스 커피 한 잔을 마셨다. 오늘도 탄수화물을 초과섭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