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길을 걷다 (02-17-금, 맑았다 흐림)

▮오늘은 쉬려고 했는데 저녁에 민예총 총회가 있어서 느지막이 사무실에 나갔습니다. 비서실장이 불 켜진 내 사무실 문을 열고 "안 나오는 줄 알았는데 나오셨네요?" 하며 웃었습니다. "예, 민예총 총회가 저녁에 있어서 겸사겸사 나왔어요" 대답하고는 함께 옥상에 올라갔습니다. 봄날처럼 날이 많이 풀렸더군요. 볕도 좋았습니다. 그런데 자리로 돌아와 웹자보로 올라온 총회 공지 포스터를 다시 확인했더니, 아뿔싸! 총회는 다음 주였습니다. 너무나 황당해서 혼자 피식피식 웃었습니다. 11시쯤 문자로 대화를 나눈 창수 형에게도 "오늘 저녁 오시지요?" 하고 묻기까지 했고, 어제 안부 전화를 걸어온 진현에게도 "낼 총회 때 올 거니?" 하고 물었었다니까요. 게다가 오늘은 교육청 가족 행복의 날이라서 다른 때보다 30분 일찍 끝나거든요. 그래서 민예총 근처에서 저녁 먹고총회에 참석할 예정이었습니다. 포스터 확인하지 않았으면 괜스레 밖에서 저녁 먹고 혼자 사무실에 들를 뻔했습니다.
▮5시 조금 넘어 사무실을 나왔어요. 집에 도착해 순대와 김치를 넣고 김치순대전골을 만들어 막 식사하려 할 때, H에게서 전화가 왔어요. 6시 20분쯤 됐을 거예요.
"선배님, 혹시 이미 집에 들어가셨나요? 나는 지금 막 사무실 나가는 중인데, 시간 되면 저녁이나 해요. 제가 4~5월에 다시 정신없이 바빠질 거 같아서요." 하는 것이었어요.
"응, 나도 막 집에 와서 밥 먹으려고 준비 중이었어. 잘 됐네. 그럼 어디서 볼까?"
물어놓고 생각해 봤는데, 정말이지 단골 술집 말고는 떠오르는 밥집이 없더군요. 그래서 일단 시청역에서 만나기로 했습니다. 사랑을 하려면 정보와 창의력이 필요할 듯합니다. 그때 H가
"저기..... 혹시 술 한잔하실 거면, 제가 차를 두고 올게요. 그게 낫지 않을까요? 그리고 나오시는 거 번거로우면 제가 만수동으로 갈까요?"
하는 것이었어요. 그래서
"아니야. 괜찮아. 그럼 차 대고 나올 때 전화해. 시청역까지 10분이면 가니까"
대답해 주고 나도 나갈 준비를 했습니다. 그리고 40여분 후 "선배, 저 지금 나가요." 하고 전화가 왔습니다.
7시 30분쯤 도착해 시청역 5번 출구에서 기다리고 있었더니 5분쯤 지나, 신연수역에서 출발한, 귀여운 베레모를 쓴 그녀가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오는 것이 보였습니다.
교육청 앞 쪽으로 걸어가며 적당한 집을 물색했습니다. 이 아이가 은근히 안 먹는 게 많습니다. 회도 안 먹고, 매운 것도 못 먹고, 뜨거운 것과 찬 것도 싫어해요. 가장 좋아하는 건 두족류, 그중에서도 오징어를 가장 좋아하지요. 그리고 중국음식을 아주 좋아합니다. 중국집은 이미 문 닫을 시간이라 순위에서 탈락! 고민 고민하다가 마침 제가 교육청 동료들과 회식할 때 가끔 들렀던 갑오징어 철판구이집을 찾아갔어요. 다행히 그녀도 맘에 들어했습니다.
"와아, 선배, 어떻게 이런 곳을 알고 있었어요? 너무 맘에 들어요."
하며 화들짝 기뻐하더군요. 소녀처럼 목소리도 높아졌습니다. 나도 약간 마음이 들떠 자꾸만 웃음이 나왔습니다.
▮9시 40분쯤 식당을 나와 수협 4거리 쪽으로 걸어갔어요. 젊은 시절 데이트하던 기분으로 밤길을 걸었어요. H는 생각보다 키가 크더군요. 전에도 여러 번 함께 걸어봤지만, 굽 높은 신발을 신고 나왔나, 오늘 유달리 그녀의 키가 커 보였습니다.
"걷는 거 힘들지 않아?" 물었더니 "저 걷는 거 무척 좋아해요. 심지어 걷는 모임도 있어요." 대답했습니다. 말도 참 예쁘게 하더군요. 꽁냥거리며 걷다 보니 수협 4거리였습니다. 원래는 양고치를 먹으려고 수협 쪽으로 간 건데, 마음이 바뀌어 혁재와 자주 가던 민예총 건물 1층 '꽃술'에 들러 곰장어와 소주로 2차를 했습니다. 그녀는 소주를 안 마십니다. 막걸리를 좋아하긴 하는데, '꽃술'에는 원하는 막걸리가 없었습니다. 잠시 고민하던 그녀는
"선배, 저 그냥 소주 마실게요. 정말 누군가와 소주를 마시는 건 처음이에요. 이게 무슨 의미인 줄 아세요?"
살짝 미소를 띠고, 그렇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물었습니다. 나는 기분이 무척 좋아졌습니다.
"그 누구와도 결코 마시지 않는 소주를 나와 함께 마시고 있으니, 내가 무척 특별한 존재인 거네? 맞아?"
했더니,
"그럼요! 이거 정말 대단한 거예요." 하며 그녀는 환하게 웃었습니다.
"와, 너무나 영광이네. 고마워." 하며 나도 기분 좋게 웃었습니다.
유쾌하게 대화하다 보니 시간이 어찌나 빠르게 지나가던지, 아쉬웠지만 H는 내일 아침 일찍(6시) 일정이 있었어요. 그래서 전철 시간에 맞춰 일어났습니다. 우리는 '불타는 금요일' 밤의 젊은 애인들처럼 유쾌하게 대화하며 예술회관역까지 함께 걸었습니다. 그녀는 송도 방면 나는 시청 방면, 개찰구 앞에서 헤어져야 했는데, 그녀는 무척 아쉬워하는 나를 꼭 껴안아준 후 승강장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송도 방면 차가 먼저 들어왔습니다. 정차한 전동차의 유리창 너머로 그녀가 차에 오르는 모습이 맞은편 플랫폼에서도 보였습니다. 조심해서 들어가라고 문자를 보내주려고 했는데, 아뿔싸, 휴대폰이 없는 겁니다. 술집에 두고 나온 것이었지요. 그녀를 태운 전동차가 출발하는 것을 지켜본 후, 다시 '꽃술'까지 걸어가 휴대폰을 건네받았습니다. 그 사이 막차는 끊겼고, 결국 택시를 타야 했는데, 이미 거리에는 손님들이 많아 택시 잡기가 쉽지 않더군요. 결국 CGV 앞까지 걸어가 간신히 택시를 잡아 타고 귀가했습니다. 돌아와 H에게 전화해서 엄살을 떨었습니다. 엄마에게 아무것도 아닌 상처를 내보이며 '호~! 해주세요' 하는 아이처럼. H를 만나면 왜 이렇게 유치해지나 모르겠어요.
그나저나 다음에는 둘이 함께 걷다가 발견한 전통주 카페에 가봐야겠어요. 젊은이들로 가득해 내가 들어가기를 망설였던 곳, 하지만 그러는 나를 보며 "어때요. 내가 있는데" 하며 그녀는 들어가 보고 싶어 했던 곳, 다음에는 그곳에 꼭 가볼 생각입니다. 그곳에서의 시간은 오롯하게 H를 위한 시간이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