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가을, 기어이 눈물을 보이네 (11-12-土, 흐리고 비)

달빛사랑 2022. 11. 12. 00:48

 

[금요일 밤에 만난 사람들]

어제는 뭔가 반갑고, 기쁘고, 혼란스러운 일들이 한꺼번에 나를 찾았던 매우 희한한 (특별하기도 한) 날이었습니다. 찬영이를 만나러 (비서실장의 차를 빌려 타고) 예술회관 쪽으로 가고 있을 때, 지방에서 올라오는 중인 찬영이의 전화를 받았습니다. 현재 화성을 지나고 있는데, 차가 너무 막혀 약속 시간에 맞춰 인천에 도착하기 힘들 것 같으니 약속을 다음으로 미루자는 전화였지요. 그러자고 한 후 갈매기 쪽으로 걸어가다가 인천집 앞에서 혁재를 만났습니다. 그는 나를 보자마자 “형, 우리 형!”하고 큰 소리를 질렀는데, 그 소리에 깜짝 놀란 젊은 여성 하나가 긴장한 표정으로 우리를 번갈아 바라보더군요. 혁재는 연신 “죄송합니다. 우리 형을 보고 너무 반가워서 소리를 질렀어요.” 하고 사과해야 했지요. 그 순간 나는 혁재가 이미 취한 상태라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는 “형, 지금 담배 사러 가는 중이거든요. 갈매기에 가시면 조구 형 계실 거예요.” 하며 편의점 쪽으로 향했습니다.

 

갈매기는 이른 시간이었음에도 제법 손님이 많았습니다. 늘 앉는 내 자리 건너 편에 조구 형이 앉아 계시더군요. 혁재도 만나고 조구 형도 만나다니, 약속이 깨진 게 오히려 다행스럽다는 생각마저 들었습니다. 담배 사러 간 혁재가 돌아오고 오랜만에 셋이서 잔을 부딪쳤습니다. 다만 이미 취한 혁재가 끊임없이 '영양가 없는 말들'을 내뱉어서 약간 짜증이 나기도 했는데, 내가 혁재에게 짜증을 낸 건 처음이었습니다. 최근 들어 필름이 끊길 정도로 많이 마신 혁재의 취한 모습을 자주 봅니다. 걱정입니다. 아무리 타고난 주당이더라도 지금처럼 술을 마셔대면 몸이 견뎌낼 수 있을까 의구심이 들거든요. 아무튼 어디서 들었는지 황당한 이야기를 여러 번 반복해서, 결국 내가 잠시 평정심을 잃고 육두문자를 내뱉기도 했습니다. 물론 혁재에게 한 건 아니고 그 말을 혁재에게 전한 녀석들을 향한 것이었지만, 후회와 짜증이 동시에 밀려들더군요. 그 말 없고 점잖으신 조구 형마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신 걸 보면 어제 혁재의 주정은 역대급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후에도 갈매기에는 계속해서 손님이 들어찼고, 피곤함을 느끼신 조구 형은 7시 20분쯤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셨습니다. 아쉬웠습니다. 하지만 더 있다 가시라고 권할 만한 형국이 아니었습니다. 혁재와 둘이서 형네 집 입구까지 배웅해 드리고 돌아와서 남을 술을 마시고 있을 때, 찬영이에게서 연락이 왔습니다. “형, 어디세요? 혹시 구월동에 아직도 계세요?” 하고 묻기에, “응, 난 혁재와 갈매기에 있어. 당분간 있다 갈 거야” 했더니, “그럼, 형, 지금 들를게요. 30분이면 도착할 거예요.” 하는 것이었다. 다행히 고속도로 정체가 풀렸는지 8시 조금 넘어 제물포에 도착했다는 찬영이는 정확히 30분 후 갈매기에 나타났습니다. 도착하자마자 배고프다며, 갈매기 형수에게 라면을 끓여달라고 부탁해서는 게 눈 감추듯 먹어 치웠습니다. 그리고 담배도 피우지 않는 친구가 “형, 담배 한 대 피우실래요” 하며 밖으로 나를 불러냈습니다. 나를 만난 이유를 말하려던 것이었지요. 그리고 듣게 된 이야기는…… 아뿔싸!

 

그는 나에게 차기 민예총 이사장을 맡아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마음이 복잡해졌습니다. 언젠가는 분명 이런 제안이 내게도 올 거라 예상하고 있었지만, 적어도 지금은 아니라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일단 나는 아들이 결혼할 때까지는 직장을 그만둘 수 없습니다. 그것은 지극히 현실적인 이유 때문입니다. 아들을 둔 아비의 마음은 한결같을 겁니다. 그리고 나는 그런 중책을 맡는 게 부담스럽습니다. 글을 써야 하거든요. 내 나이 이미 60이 넘어, 하고 싶은 일을 하며 남은 삶을 갈무리하기도 버거운데, 감당하기 어려운 일을 덜컥 맡아서 이도 저도 아닌 포지션으로 살아가기가 싫다는 겁니다. 그래서 거절했습니다. 찬영이도 “형, 당장 결론 내리지 마시고 며칠 고민해 보시고 결정하세요.” 했다. 알겠다고 했지만, 말을 듣는 순간 이미 나는 결론을 내린 상태였습니다. 당연히 '싫어!'였지요. 하지만 내내 불편한 마음이 가시질 않더군요. 내 처지와 상황을 먼저 헤아리지 않고 조직의 어려움만 사고의 중심에 둔 후배들이 몹시 야속하다는 생각마저 들었습니다. 

 

다시 자리로 돌아와 애써 담담한 표정으로 남은 술을 마시고 있을 때, 뜻밖에도 H로부터 “선배님, 어디세요? 저는 공연 보고 가는 길인데, 혹시 어디 계신지 궁금해서 연락해 봤어요.” 하는 전화가 걸려 왔습니다. 반가웠습니다. 내가 갈매기에서 혁재, 찬영이와 술 마시고 있으니 들렀다 가라고 했더니, “차를 가지고 있어 술은 못 마셔요. 그리고 그분들과 있는데 어색하지 않을까요?” 하더군요. “다 아는 사람들인데 뭐. 들렀다 가.”했더니, “알겠어요.”하고 15분쯤 후에 롱 코드 차림의 H가 갈매기로 들어왔습니다. 혁재와도 반갑게 인사하고, 찬영이와도 인사를 나눈 후, 배가 고프다고 해서 물 두부를 시켜주었습니다. 허기가 졌던지 맛있게 먹더군요. 그 모습이 무척 사랑스러워 보였습니다. 취한 혁재가 실수할까 봐 내심 걱정했는데, 다행히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술이 얼근해진 찬영이가 일어날 때, 나와 H도 따라 일어났습니다. 혁재는 한 잔 더하고 가겠다고 해서 우리 셋만 예술회관 쪽으로 걸어 나왔습니다. 찬영이만 아니었다면 어디 가서 H와 차를 한 잔 마시고 헤어지려 했는데, 아쉽게도 H를 먼저 보내줄 수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H를 먼저 보내주고 찬영이와 나는 전철을 타고 함께 귀가했습니다. 집에 돌아온 후 H와 짧은 문자를 주고받은 후 뜨거운 물로 샤워를 했습니다. 피곤이 다소 풀리는 것 같았습니다. 아무튼 어제는 정말 드물게도 묘한 날이었습니다. 각기 다른 색과 결로 만나게 되었지만, 어제 만난 사람들은 모두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인 것만은 틀림없습니다.


오후가 되면서 비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제법 굵은 비입니다. 가는 가을이 결국 아쉬움을 참지 못했나 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