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고기를 먹다
오전에는 늘 다니는 병원에 들러 처방전을 받고 약국에 들러 한 달 분 혈압약과 고지혈약을 받아왔다. 오후가 되면서 날이 흐렸다. 예보대로라면 눈이 왔어야 했는데, 눈은 오지 않고 밤늦어 진눈깨비 날렸다. 영화와 유튜브 동영상을 골라보면서 느긋하게 오후를 보내고 있을 때 후배 장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최근 들어 말이 많아진 후배인데, 아마도 오랫동안 혼자 살다 보니 외로움을 타는 모양이다. 50대 중반인 지금까지 미혼이니 왜 외롭지 않겠는가. 그래서 그런가 한 번 전화를 걸면 수다스러운 아줌마 아저씨들처럼 한 시간 가까이 통화를 하게 된다. 관심사도 다양하고 오지랖도 넓어 대화의 소재는 무궁무진하다.
후배는 유복한 집에서 태어났지만, 대학입학부터 자신의 꿈과 어긋나기 시작하면서 삶의 모습이 많이 꼬였다. 그래도 부모님이 재산이 많아 백수로 살면서도 궁티가 나지 않는 삶을 살아왔으니 비빌 언덕이 전혀 없는 자수성가형 인물들에게는 부러움의 대상이다. 지적 호기심이 많고 말을 잘하며 친화력도 좋아 주변에 아는 사람이 많긴 하지만, 가끔 그 ‘말’로 인해 동료들과의 관계가 어색해지기도 한다. 물론 그건 후배만의 잘못이라기보다는 쌍방 과실인 경우가 많긴 하다. 아무튼 후배는 내게 자신의 속마음을 잘 털어놓을 뿐만 아니라 깍듯하여 장(張)이 연락해 오면 특별한 일이 없으면 만나 술을 마셔주는 편이다.
오늘도 후배는 전화를 걸어 그간 자신이 겪은 일과 최근 돌아가는 일에 대해 질문의 형식(부가 의문문의 형식)을 빌려 자신의 속마음을 한바탕 늘어놓다가 대뜸 “형, 낮술 한잔 어때요?” 하는 것이었다. 나는 어제도 술을 마셨기 때문에 “내가 예전처럼 술을 많이 못 마셔. 이번 주에 마실 양은 이미 다 마셨어. 오늘은 쉴래. 다음 주쯤에 내가 연락할게” 했더니, “알았어요.”하고 나서 다시 자기 이야기를 풀어나갔는데, 이야기를 듣다가 문득 ‘차라리 만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게 나을 뻔했는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한 시간 가까이 통화를 하다가 다시 장은, “형, 우리 동네 오시면 정말 맛있는 소고기 제가 살게요.” 했다. 나는 결국 “어딘데?” 하고 물을 수밖에 없었다.
전화를 끊고 바로 나가 두 시쯤 제물포역 앞에서 후배를 만났다. 가는 곳은 수봉산 아래, 용현시장 끝자락에 있는, 강화 출신 제고 18회 선배가 운영하는 정육식당이었다. 가자마자 장은 “이 형님 역시 제고 출신이세요.”라며 사장님인 선배에게 인사를 시켰다. “아, 그래요? 몇 회세요” 하며 사람 좋은 얼굴을 하며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나는 이런 형식의 통성명을 무척 피곤해하는 편이다. 손님과 사장의 관계가 선후배 사이로 치환되고 나면 다음 단계는 ‘족보 확인’이다.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고 나는 사장인 선배와 나 사이에 겹칠 수밖에 없는 서너 개의 인간관계를 풀어놓아야 했다. 후배 장은 이런 족보 확인 과정을 무척 즐기는 표정이었다. 그곳에서도 후배의 장광설과 족보 속 선배, 지인들의 안부 확인 과정이 장시간 이어졌고, 그러는 순간에 두툼한 소고기 안심이 불판 위에 올랐다. 가격을 보니 무척 저렴했다. 500g에 2만8천 원, 가격이 너무 착해 감동했다. 한우야 아니겠지만, 고기도 부드럽고 맛도 좋았다. 장은 가방에서 버터와 통후추를 꺼내 자신의 취향대로 고기를 구운 후 내 앞에 놓아주었다. 그럴 때는 문득 혁재가 생각났다.
안심 500g, 차돌박이 250g과 소주 4병을 나눠 마시고 선배의 정육식당을 나왔다. 진눈깨비가 드문드문 날렸다. 나는 딱 적당하게 취해 집에 가려고 했으나, 장은 2% 부족한 듯 “형, 구월동 가서 딱 한 잔만 더하면 안 돼요?” 하며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할 수 없이 택시를 타고 구월동으로 나와 경희네에 들렀다. 넉살 좋은 장은 경희네 사장님과도 쉽게 친해졌고, 다음에 또 오마고 약속까지 했다. ‘밑 빠진 독의 주량’을 가진 장을 당할 재간이 없어 나는 더디게 마셨다. 그곳에서 나와서도 만약 내가 “갈매기 가서 3차 할까?” 했으면 그는 “콜!” 했을 것이다. 7시쯤 일어섰고 함께 전철을 타고 돌아왔다. 고기를 먹어서 그런지 속이 편하고 든든했다. 술 마시고 귀가한 후 라면이나 냉면이 당기지 않은 건 정말 오랜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