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자신의 행운을 알까 모를까
J는 막일을 한다. 어제 갈매기에서 그를 만났을 때, 그는 자신의 일에 보람을 느낀다고 말을 했고 심지어 재미를 느낀다고까지 했다. 그 말은 사실일 것이다. 보람과 재미의 유효기간이 길지 않아 문제일 뿐..... 그런데 그는 기본적으로 착한 성정을 지니고 있지만, 결정적으로 사회성이 부족해서 가깝게 지내던 지인들과 자주 척을 지곤 한다. 가끔 그런 모습이 코미디 같다는 생각을 했다. 어제까지만 해도 죽이 맞아 어울리던 선후배들과 하루아침에 소원한 사이가 되어 술집 구석 자리에 앉아 홀로 술을 마시는 모습을 자주 보았다. 그가 친하게 지내는 사람들이 대개가 내 후배들이기도 해서 이야기를 들어보면, 시작은 말실수로 촉발된 문제이지만 이야기가 깊어지다 보면 세계를 바라보는 그의 관점이 공허하거나 지나치게 협소하기 때문에 말싸움이 되고 결국에는 욕설까지 나오게 된 경우가 많았다. 그는 친하게 지내던 선배들과는 한번 이상 관계가 소원해져서 혼자 돌아다녀야 했던 걸로 알고 있다. 혁재와, 은준이, 은수를 비롯해서 두어 명이 더 있다. 남의 말을 좀처럼 하지 않거나 하더라도 따뜻한 이야기만 할 줄 아는 근직이조차 J를 꾸짖었다는 말을 들었는데, 그걸 보면, J가 외고집이거나 상처를 쉽게 받는 성정의 소유자이거나 도무지 남의 말을 들으려하지 않는 협소한 세계관의 소유자가 아닐까 싶긴 한데..... 문제는 선배들과 관계가 소원해져도 애써 그것을 회복하려 하지도 않는다는 것인데, 그건 그가 무척 내성적인 성격이기 때문이기도 하고 관계를 회복하는 방법을 모르기 때문인 것 같다. 그렇게 불편한 관계를 꾸려가다가 선배 쪽에서 자연스럽게 손을 내밀면 멋쩍은 표정을 지으며 슬며시 선배의 손을 맞잡으며 이전 관계를 회복하는 패턴을 반복하더라는...... 그런 그가 나에게는 무척 깊은 이야기를 자주 해주곤 하는데, 아마도 내가 많이 들어주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간간이 추임새를 넣으며 그의 처지와 생각에 공감해주기도 하고. 부수적이긴 하지만 그가 무척 어려웠을 때, (뭐, 나도 넉넉한 적이 한 번도 없었지만, 상대적으로) 자주 술값을 내준 것도 나에게 마음을 열게 한 요인일 것이다. 그런 그가 최근 자신의 일과 일상을 장황하게 풀어놓았다. 나는 언제나 그랬듯이 덤덤하게 들어주었고 어떤 부분에서는 응원을 해주었다. 가려고 일어서려던 그가 그런 나의 반응을 보고 다시 앉아서 막걸리 두 병을 더 마시게 되었는데, 옆에서 이야기를 듣던 갈매기 형이 “다 좋은데, 너는 빨리 빚을 청산해야 돼. 그리고 적게나마 적금을 들도록 하라고.”라며 지청구를 주었다. 나는 “왜? 빚이 그렇게 많아?”라고 물었다. 그랬더니 “아니에요. 그렇게 많지는 않고.... 이제 5백만 원 정도 남았는데, 지금 벌이로 충분히 갚을 수 있어요.”라고 말하며 한마디 덧붙였는데, 나는 그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갚을 능력이 있기 때문에 천천히 갚으려고 해요. 그걸 빨리 갚으려고 하면 내가 계획하는 생활에 차질이 생기거든요.”라고 하는 게 아닌가. 당연히 나는 “무슨 소리야. 일단 빚부터 갚아야지. 집을 옮겨야 한다면서? 대출을 받더라도 신용이 어느 정도 나와야 받을 수 있어. 카드 대출이 남아 있으면 신용이 낮아서 네가 원하는 만큼은 고사하고 아예 대출자격이 주어지지 않을 수 있으니 빨리 카드빚부터 갚으라고”라고 언성을 높였다. 옆에서 갈매기 형도 내 말을 거들었다. 철이 없는 건지, 몽상가의 삶을 살고 있는 건지 도무지 가늠할 수 없었다. 그래도 두 형들이 말하는 것에 대해 반박하지는 않고 “그래요?” 하며 경청하기는 했다. 지금 월세살고 있는 집이 팔려서 이사를 가야 하는데, 현재 전월세가 터무니없이 올라서 지금 사는 집의 보증금으로는 같은 규모의 집으로 이사하는 건 언감생심일 것이다. 순진한 건지 한심한 건지, 그의 이야기를 듣는 내내 답답해서 미칠 지경이었다. 애초 자신이 지금 기술을 배우고 있고 일도 재미있어서 조만간 더 큰 직장으로 갈 수 있을 거라는 이야기만 들었을 때는 나 역시 응원을 보냈지만, 가려다 말고 앉아 다시 풀어놓은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답답하기 그지없었다. 큰 고생을 해보지 않은 게 틀림없었다. 어쩌면 J처럼 사는 게 맘이 편한 삶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뭔가 후배에게는 전향적인 변화가 필요하다. 변화하지 않으면 룸펜으로 살아갈 가능성이 농후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많은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가 내 이야기를 얼마나 깊이 있게 경청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리고 나이 먹어 생활 습관을 바꾸기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라는 걸 나는 안다. 나 또한 바꾸고는 싶지만 오랜 관성 때문에 바꾸지 못하고 있는 나쁜 습관이 많다. 하지만 그래서 더욱 비판과 조언, 격려와 질책을 해줄 필요가 있다. 삶의 방향을 잃어 힘들 때, 누군가 나에게 진정성 있는 비판과 조언을 해주었다면 지금보다는 훨씬 내 삶이 아름다워졌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가끔 한다. 지금 그에게는 단순한 비난과 무의미한 박수보다는 대안을 전제한 냉정한 비판, 그리고 애정 어린 격려가 필요할 때이다. 그래도 그의 주변에 좋은 선배들이 많다는 것은 얼마나 큰 행운인가. 그가 그러한 사실을 인정하고 않고는 별개의 문제다. 행운을 행운으로 받아들이느냐 귀찮은 간섭으로 받아들이느냐는 그의 선택이겠지만, 선배들은 그 선택조차 현명하게 할 수 있도록 힘이 돼 주어야 한다는 게 나의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