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장맛비는 부슬부슬 내리고, 나는 소설을 읽고

달빛사랑 2021. 8. 25. 00:19

 

김금희 소설 『복자에게』(문학동네, 2020)를 읽었다. 제주를 공간적 배경으로 하는 이 소설은 아픔을 극복하는 저마다의 방식 또는 아픔의 연대에 관한 이야기다. 다시 말해, 어릴 적, 자신이 저지른 일의 본질조차 모른 채 상대에게 상처를 주고, 오랜 세월이 흐른 후, 그로 인해 소원해졌던 친구를 우연히 만나 관계를 복원해 가는 이야기다. 김금희 작가 특유의 섬세한 문체와 인물에 대한 애정이 핍진하게 드러난 이 소설을 읽으며 독자들은 마치 자신의 유년을 거울을 통해 들여다보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될 것이다.

 

무엇보다 이 소설에는 거대 의료자본과 힘겨운 싸움을 벌이는 여성(들)이 등장하는데, 그녀들은 남성을 비롯한 주변의 도움에 기대기보다 자신들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주인공인 ‘내(이영초롱)’가 부모의 파산으로 인해 원하지 않는 제주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을 때 우연히 알게 된, 이 소설의 제목이기도 한 제주 토박이 소녀 ‘복자’가 그 대표적인 인물이다. 병원 측의 편법과 전횡, 부당노동행위 강요로 인해 아이를 잃고 남편과 별거 중이던 복자는 자신의 불행과 아픔을 개인적 차원에서 해소하려 하지 않고, 연대를 통해 잃어버린 권리를 되찾기 위해 동분서주한다.

 

 

징계성 발령을 받아 다시 제주로 내려온 '나'는 그곳에서 우연히 복자와 재회한다. 당시 복자는 자신이 근무하던 의료원을 상대로 산재 소송을 진행하고 있었는데, 판사인 '나'는 해당 사건을 담당하는 재판부에 배석 판사로 합류하게 된다. 이러한 상황은  에게도 복자에게도 엄청난 부담으로 작용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복자는 어느 날 ‘나’를 찾아와 해당 사건에서 손을 떼달라고 부탁한다. 그것이 친구인 ‘나’의 부담을 없애주려는 것인지, 아니면 ‘나’ 때문에 재판의 진정성이 훼손될까를 우려했기 때문인지는 알 수 없지만, (원고의 친구가 담당 재판부의 판사 중 한 명이라는 소문이 이미 제주 유력자들에게 널리 알려졌고, 그것을 빌미로 의료원 측에서 역공을 취하기 시작했다. 결국 주인공은 재판부에서 밀려난다) 이제 더는 어린 시절처럼 오해로 인해 사랑하는 친구와 멀어지는 일은 없을 거라 다짐했던 주인공은, 힘이 되주고 싶었던 친구로부터 ‘손을 떼달라’는 소리를 듣는 순간 적잖은 충격을 받는다. 결국 복자는 '나'의 도움없이 자신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한다.(상고심까지 가는 8년간의 소송 끝내 마침내 승소한다)

 

그렇다면 왜 공간적 배경을 제주로 했던 걸까. 사실 소설의 주제와 제주라는 공간의 연관성은 딱히 없다. 그 이유를 작가는 ‘후기’에서 밝힌다. 작가의 말에 의하면 제주의 한 의료원 간호사들이 의료원 측을 상대로 산재 소송을 제기해 승소한 사건이 실재했다고 한다. 작가는 우연한 기회에 8년간 이어진 그녀들의 투쟁 관련 뉴스를 보게 되었고, 그 뉴스를 보는 순간 여성 노동자들의 권리와 제주에 관한 소설을 쓸 용기를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왜 작가가 제주를 공간적 배경으로 삼았는지가 이해가 간다. 물론 복자의 이야기가 이 소설의 전부는 아니다. 이 소설에는 운동권 출신 학생의 후일담도 나오고, 제주 해녀들의 치열한 삶, 판사들의 현실적 고뇌 등 다양한 이야기들이 얽히고설켜 서사를 풍성하게 만들고 있다. 인간관계에 있어 모래를 씹는 듯한 느낌을 받고 있거나 미처 말할 기회를 놓쳐, 소원해진 친구와 관계를 회복하고자 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 소설을 적극 추천한다. 마음이 무척 따듯해지는 소설이다. 그녀의 문재가 부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