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한 날의 소박한 행복

아침 일찍 일어나 화초에 물을 주었다. 관리와 관심받는 아이들이라서 그런지 잎마다 윤기가 흘러 기분 좋았다. 혁재가 준 화초도 쑥쑥 잘 자라고 있다. 별로 상황과 조건의 후박(厚薄)을 따지지 않는 녀석이다. 집안에서 햇볕이 놀다가는 서너 시간은 나도 광합성 하는 화초처럼 행복함을 느끼는 시간이다. 이미 깨끗하고 대충 정리 정돈이 끝난 집 안이지만 자꾸만 일거리를 찾아서 분주해지는 시간이다. 볕이 들어와 바닥이나 벽면을 훑고 지나갈 때마다 잠자던 먼지들이 일제히 존재 증명하듯이 앞다투어 일어난다. 나의 청소 본능이 꿈틀대는 순간이다.
오늘은 주방을 정리했다. 싱크대 묵은 때를 벗겨냈고, 쓰지 않는 냄비와 그릇들을 닦아서 찬장 안에 넣었다. 그리고 그간 아껴 쓰느라 찬장 안에 방치했던 냄비나 그릇들을 그릇장에 위에 꺼내 놓았다. 앞으로는 세련되고 멀쩡하고 예쁜 새것만을 사용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아낀다고 찬장 깊숙이 보관해 놓아 봐야 쓸 일이 만무하다. 엄마는 옛날 사람답지 않게 버리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놔둬 봐야 짐이 될 게 뻔한 그릇이나 안 입는 옷가지를 과감하게 걸러내셨다. 재활용품으로 내놓으면 필요한 사람이 가져다 쓸 테니 아까워할 이유가 없다면서 말이다. 그건 물건을 소중하게 여기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비울 줄을 아는 마음의 여유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쓰지 않을 게 분명한데도 끌어안고 있는 것이 오히려 부질없는 욕망이라는 걸 엄마에게 배웠다.
아침에는 간단하게 채소를 곁들여 밥을 먹었고 점심에는 떡만둣국을, 저녁에는 된장찌개를 끓여서 맛있게 먹었다. 혼자 먹는 식사라도 격식을 차려서 먹으려고 한다. 반찬거리만 있다면 제법 그럴듯한 식탁을 만들 수 있다. 그렇게 만들어진 식탁 앞에 앉으면 소박하지만 내 일상의 품위가 아울러 높아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곤 한다. 귀찮다고 대충 먹기 시작하면 꼭 그만큼의 규모로 내 삶은 옹색해지는 거다. 자신의 품위는 자신이 만든다. 옹색한 식탁을 만들 것인가, 뿌듯한 식탁을 만들 것인가는 소소한 귀찮음을 견딜 수 있느냐 없느냐에 달려있다. 나는 나의 품위를 위해 주방 안에서 기꺼이 귀찮음을 견딜 수 있다.
친구 S가 요즘 사업의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구리 오퍼상을 운영하고 있는데, 몇 년 전부터 사업(특히 자재구입)이 여의치 않은 모양이었다. 내가 어려울 때 선뜻 도움을 주었던 친구다. 전화를 걸어 안부를 묻고 계좌번호를 물어 백만 원을 송금해줬다. 친구는 극구 사양하며 아직은 자신이 나보다는 여유로우며, 또한 요즘에는 사업 실적도 많이 좋아져 도움받을 정도는 아니라고 말을 했지만, 그냥, 마음을 표현하고 싶었다. 도와주고 싶었다. 맘 같으면 더욱 큰 도움을 주고 싶었지만, 나도 그리 넉넉한 편이 아니라서 많이는 못 보내고 그저 가족들과 한우 고깃집에서 민망하지 않은 식사를 할 수 있을 정도의 금액을 보냈다. 모두가 힘든 나날들이다. 의리와 믿음마저 말라버린다면 지금의 시간은 그야말로 짐승의 시간과 무엇이 다를 것인가. 도움을 줄 수 있어 행복하고 그 소박한 도움을 거절하지 않고 받아준 친구가 있어 행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