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르는 날들④ : 볕 잘 드는 집
어제 백기완 선생 빈소에 들렀을 때 세찬 바람에 휘장과 조기, 시든 국화 다발이 속수무책으로 날렸다. 바람을 막을 만큼 길고 튼튼한 천막이 아니라서 빈소의 풍경은 스산했다. 민주화센터 오 대표가 혼자 바람을 감당하느라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영정 속 백 선생님은 환하게 웃고 있었다. 일생을 시련 속에 몸을 던진 투사의 삶을 상징하는 듯한 을씨년스러운 날씨 속에서 그 웃음은 무척이나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바람은 무엇 때문에 그렇듯 화가 났던 걸까. 돌아서 오는 길 내내 발걸음이 무거웠다.
다행히 발인을 하루 앞둔 오늘은 기온이 어제보다 다소 올랐고 바람도 비교적 잔잔해졌다. 선생의 발인인 내일은 더욱 날씨가 풀려 포근한 한낮이 되리라는 예보다. 바람도 추위도 염치가 전혀 없는 건 아닌 모양이다. 오래전 민중운동 시절 ‘날씨 탄압’이라는 말이 있었다. 집회나 시위를 조직했을 때 공권력에 의한 탄압도 우리를 힘들게 했지만, 일정을 제대로 치를 수 없을 만큼 닥쳐온 혹한과 혹서, 폭설과 강우도 우리를 힘들게 했다. 그때 동지들이 푸념하며 내뱉은 말이 바로 ‘날씨 탄압’이었다. 적어도 백 선생의 발인 날에는 날씨가 순해져 ‘날씨 탄압’은 없을 것 같다.
동북향인 우리 집에도 볕이 서너 시간 머물다 간다. 아침에는 엄마 방과 안방에서 두어 시간 머물던 볕은 오전 10시부터 1시까지는 거실과 내 방에서 머물다 간다. 낮 동안 종일 머무는 볕은 아니지만, 나는 그 두어 시간의 환한 내 방이 너무도 좋다. 이만큼의 볕조차 만나지 못하는 반지하의 방들도 부지기수다. 결혼하고 독립했을 때 신혼집이 그랬다. 안방에 들어가면 밤인지 낮인지 구별되지 않았다. 토굴 같은 그곳은 안기부 요원들에게 침탈되기도 했다. 그들은 결혼한 지 보름 된 아내를 연행하여 결국 구속했고, 나는 수배 상태가 되어야 했으며 수백 권의 책들은 압수되었다. 자형이 선물로 준 카세트플레이어는 평지와 잇닿은 창문을 열고 누군가 훔쳐 가기까지 했다. 지금도 그곳을 생각하면 우울해진다.
사회주의 운동이 소강상태로 접어들고 구속됐던 아내가 석방된 후 나는 생계를 위해서 학원에 나가 아이들을 가르쳤다. 강의평이 좋아 수강생이 많아져 돈도 많이 벌었다. 25평, 32평 두 채의 아파트를 소유했으며 마지막으로는 52평 아파트에서 살았다. 지하에서 지상으로 나오는 데 3년 정도 걸렸다. 새로 산 집들은 하나같이 볕이 잘 드는 남향이었다. 아무리 싼 가격에 나왔더라도 볕이 들지 않는 집은 고려 대상에서 애초부터 제외했다. 습기와 냄새와 벌레들 지천인 반지하의 생활은 기관지가 안 좋은 나에게는 치명적이었다. 잦은 감기와 상시적인 기침에 시달려야 했다. 집을 사서 지상으로 나왔을 때 가장 기뻐한 것은 엄마였다. 32평 집으로 이사하면서 그간 동생과 함께 살던 부모님을 우리 집으로 모셔왔다. 아마 내 평생에 모든 가족이 가장 환한 표정으로 서로를 마주하던 때가 32평 아파트에 살던 그때였다고 생각한다. 일주일에 한 번 만나고 헤어지던 아들 수현이는 할머니 할아버지 엄마 아빠 모두와 함께 살 수 있어서 정서적으로도 안정적인 유년을 보낼 수 있게 되었다.
이후 두어 차례의 이사를 거쳐 지금의 단독주택으로 오게 되었는데, 남향이 아닌 것이 무척 아쉬웠지만 그래도 하루에 서너 시간 볕을 만나니 얼마나 다행인가. 엄마가 당신의 방을 청소하고 화장을 할 때는 방안을 환하게 비춰주다가 거실로 나와 소파에 앉아있을 때는 하얀 엄마의 얼굴과 작은 체구 위로 대견하게 내려앉던 햇볕, 조는 듯 웃는 듯한 엄마의 표정을 볼 때마다 기분 좋아지던, 볕이 우리 집에 머물던 바로 그 두어 시간……. 앞으로 또 어느 곳 어떤 집에서 살게 될는지는 모르겠지만, 단칸방이라도 볕만 잘 든다면 나는 기꺼운 마음으로 그 집에 살 것이다. 하늘도 공기도 모두 맑고 볕은 눈 시리게 투명해서 행복한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