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상대성, 깜빡잠의 순기능에 대해

흐린 날씨에 미세먼지마저 창궐한 도시는 초점이 맞지 않는 안경 너머 풍경처럼 뿌옇게 보였다. 교육청 옥상에서 바라보이는 초고층 오피스텔 상층부에는 안개인지 먼지인지 모를 뿌연 구름 띠가 창문가를 서성이다 스멀스멀 벽면을 타고 흘러내렸다. 오후가 되면서 바람은 점차 차가워졌다. 어제는 봄날처럼 따뜻했는데, 내일은 다시 영하 9도까지 내려간다고 한다. 예보에 의하면 눈이나 비가 내릴 것이다. 아마도 마지막 꽃샘추위가 아닐까 생각한다.
오늘은 책상 앞에서 멍하니 잡념에 빠지는 일이 많았다. 책도 읽지 못했고 글도 쓰지 못했다. 가끔 담배 피우러 옥상에 올라가서 바람을 쐬다 내려오곤 했다. SNS에 들어가 봐도 온통 가슴을 답답하게 만드는 잡설들뿐 위로가 되는 글을 만나지 못했다. 아니 애초에 그곳에서 위로를 얻으려 한 자체가 무모한 바람이었다. 그곳은 위로를 주는 곳이 아니라 저마다의 인정 욕구가 원색적으로 난무하는 골치 아픈 곳일 뿐이다. 요설과 궤변, 저주와 윤색이 횡행하는 배설의 공간 말이다. 나도 가끔 그곳에 감정의 찌꺼기를 쏟아놓고 오곤 했다. 그때마다 속이 시원해지기보다는 오히려 허허로움만 느꼈다. 간혹 건강한 글과 진지한 태도를 만나기도 하지만 그런 사람은 대체로 수많은 적을 상대해야만 한다. 어느 순간부터 나도 그곳의 지배법칙과 질서의 논리에 순응하며 쟁점이 될 만한 글을 쓰지 않게 되었다. 그저 지극히 사적인 푸념이나 감상 따위의 글을 올릴 뿐이다. 이빨과 발톱을 드러내지 않으면 그곳은 나에게 우호적인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나는 그곳에 작동하는 정글의 법칙을 무서워하기보다는 귀찮아한다. 그래서 순치된 사람의 코스프레를 하고 있다.
매주 나가는 연재물 중 금주 분을 작성해 소통협력실에 보낸 후 의자에 앉은 채 잠깐 졸았다. 그 짧은 시간에도 오만가지 꿈을 꿨다. 일어나 시간을 보니 내가 졸았던 건 고작 10여 분. 시간의 상대성을 느끼는 순간이다. 공상과학영화에서 흔히 만나는 모티브인 타임머신이나 서로 다른 속도로 흐르는 시간, 이를테면 어쩌다가 블랙홀과 화이트홀이 연결된 웜홀을 통해 다른 차원으로 빨려든 인물들이 잠깐 소동을 벌이고 우여곡절 끝에 지구로 돌아와 보니 지구의 시간은 이미 수십 년이 흘렀다는, 뭐 그런 종류의 이야기가 허무맹랑한 게 아니라 가능할 수도 있겠다는 일순간의 느낌. 오후의 깜빡 졸음이 물리학의 특정 가설을 수긍하게 만들다니, 작업 효율만이 아니라 공상의 과학화와 그 지식에 대한 돈오(頓悟)를 위해 티 나지 않게, 들키지 않게 가끔 졸아야겠다. 희희(嬉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