습작기의 떨림을 회복할 순 없을까
시 쓰기에 너무 게을렀다. 두 달 동안 두 편의 시를 썼을 뿐이다. 원할 때마다 자판기처럼 작품이 만들어지는 건 아니겠지만, 무엇보다 두려운 것은 떨림이 없는 시 쓰기를 하게 되는 것이다. 컴퓨터나 워드프로세서도 없이 오직 육필로 원고를 쓰던 습작 시절, 필기감 좋은 만년필로 하얀 종이에 시를 쓸 때의 그 떨림, 잊을 수가 없다. 몇 차례의 퇴고 과정을 거쳐 학교 신문이나 잡지에 시를 게재했을 때의 그 성취감이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었다. 늘 습작 노트를 가방에 넣고 다니다가 시상이 떠오를 때마다 그것을 노트에 적어 내려가던 흥분과 떨림, 어떻게 잊을 수 있겠는가. 의욕만 많았을 뿐 문재(文才)가 탁월하지 않아 느꼈던 열패감조차 아름다웠던 시절이었다. 그런데 그 습작기의 떨림이 이제는 점점 무뎌지는 것 같아 안타깝다. 물론 지금도 시를 쓰고 나면 일정한 희열을 느끼기는 하지만, 그것은 스무 살 시절의 그 떨림과 희열이 아니라 의무를 이행했을 때의 홀가분에 가까운 감정일 뿐이다. 시 쓰기를 의무로 느끼는 것은 한편으로 슬프고 한편으로는 다행이다. 머리가 굳어 이제는 시상(詩想)이 다채롭지도 않을뿐더러 그나마 무채색 시상조차도 내가 의식적으로 부르지 않으면 좀처럼 내게 올 생각을 하지 않으니 슬픈 것이고, 또 한편으로는 그래도 여전히 내가 의식적(의무적)으로나마 시를 곁에 두고 싶어 하는 마음이 있다는 것이 다행스러운 것이다. 생활이 단조로우면 시 쓰기에도 떨림이 없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변화 없는 생활 속에서는 종종 시를 쓰는 것이 아니라 ‘만들게’ 된다. 다만 내가 기대를 하는 건, 내일부터 내 생활에도 변화가 있다는 것이다. 내 삶을 돌아보면 그것은 무척 큰 변화라고 할 수 있다. 그 변화가 내 시 쓰기를 다시금 치열하게 만들어주고 떨림을 회복할 수 있게 해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리고 앞으로는 성격에 맞지 않는 청탁은 냉정하게 사양하려고 한다. 글을 청탁한 상대에게도 그것이 예의라고 생각한다. 맞지 않는 옷을 입은 것처럼 불편하기도 하고. 선택과 집중을 통해서 관심과 관계의 ‘몸피’를 조정해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