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여전히 예술에서 희망을 찾는다

머릿속이 마른 낙엽처럼 버석거린다. 센터가 문을 닫아 운동하지 못하니 몸도 맘도 무겁다. 설사 스포츠센터가 문을 열었다 해도 코로나 위험 때문에 방문하기를 머뭇거렸을 것이다. 코로나가 모든 것을 얽히고설키게 만들어 버렸다. 오늘도 300명이 넘는 확진자가 나왔다. 하루 확진자 수로는 만만찮은 수치다. 사스나 메르스 때도 두려움은 있었지만 지금 같지는 않았다. 내가 조심만 하면 감염을 피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꼭 만나야 할 사람을 만나는 것도 늘 가던 곳을 방문하는 것도 안심할 수 없는 일이 되었다.
두려움은 이제 일상이 되었다. 두려움은 사람과 사람 사이를 이간하는 정서적 기제다. 불신은 일반화되고 적대감은 증폭된다. “너 때문에 왜 우리가 피해를 봐야 하는 거지?”라는 불만은 인간관계를 훼손하고 타인과 자신을 동시에 소외되게 만들 것이다. 전통적 의미의 공동체 개념은 사라지고 이기적 욕망과 배타적 인간관계만 횡행하게 될 것이다. 인정은 거추장스러운 심리 상태일 뿐이고 이타적 연대는 요원해질 것이다. 하루하루가 묵시적 긴장 속에서 시작되고 저물 것이다. 종말을 예감하며 현실을 부정하는 광신적 흐름 또한 발호할 것이다. 디스토피아가 된 세상에서 유일한 생존 전략은 돈과 안온한 자기만의 보금자리를 지켜줄 도덕성이 담보되지 않은 물리력뿐일 것이다. 시인과 작가들은 황량한 세계의 슬픈 표정을 기술하는 서기관이 될 것이다. 예술은 점점 더 골방과 작가의 작업실 속으로 후퇴할 것이고 그곳에서 예술가들은 자조하며 고사(枯死)하거나 허락되지 않는 상상을 하며 훗날을 도모하는 자족적 혁명가가 될 것이다. 그런데…… 소설 속에서나 그려질 법한 이 모든 예상이 상상의 결과가 아니라 눈앞의 현실이 되고 있다는 걸 확인하는 일은 무척 곤혹스럽다.
그렇지만 나는 여전히 예술에서 희망을 찾는다. 이 예측 가능하고 일부는 현실로 다가온 그악스러운 상황 속에서 인민에게 새로운 상상의 지평을 제시하고 희망을 줄 수 있는 건 예술뿐이다. 정치는 이미 실종됐고 교육은 난맥(亂脈) 속에서 갈피를 잃었으며 종교는 기복적 광신도만 양산할 게 뻔하다. 이기적 욕망의 발호와 길 잃은 신앙의 끝없는 추락과 적대와 불신의 팽배 속에서 일용할 양식만큼 소중한 것은 내일에 대한 희망이고, 그 희망이 힘을 얻기 위해서는 상상의 힘이 필요하다. 예술가의 건강한 상상력은 미래의 동력이다. 신기루를 보여주어 더 큰 좌절을 느끼게 하는 상상이 아니라 일상에 매몰되어 보지 못하던 다른 세계를 보여주는 것, 현실의 완력을 희화화하고 연대의 가능성을 모색할 수 있게 해주는 희망으로써의 상상, 그런 발랄하고 건강한 상상이 필요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 엄혹한 묵시적 재난의 상황 속에서 모든 예술가는 미래를 상상하고 조형하는 설계자가 되어야 한다. 자괴와 패배감을 극복하고 발랄한 미래의 모습을 그리며 ‘살아 움직이며 실천하는’ 혁명가가 되어야 한다. 그것이 시대와 역사가 예술가에게 강제하는 숙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