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를 쓴다는 것은 얼마나 엄중한 일인가
오늘은 박영근 시인 13주기 추모 모임이 있는 날이다. 채 쉰 살이 되기 전에 목숨을 놓아버린 형의 기일에는 전국 각지에서 많은 문인들이 찾아와 고인과 얽힌 저마다의 추억을 풀어놓으며 추모의 시간을 가져왔다. 4년 전에는 형의 이름으로 문학상이 만들어지고 올해로 네 번째 수상자를 배출했다.
시인들이 동료의 죽음을 기억하는 방식은 바로 먼저 간 동료의 이름과 작품을 끊임없이 불러주는 것이다. 시인의 몸은 비록 세상에 없다 해도 그의 시는 지상에 남아 많은 이들에게 읽히고 회자되고 그들의 가슴을 격동시킴으로써 산 자들과 더불어 그들 곁에서 영원히 사는 것이다. 그것이 예술의 힘이자 시의 마법일 것이다. 그렇다면 시를 쓴다는 것은 얼마나 엄중한 일인가. 그 엄중함을 생각했기에 정서적 결벽을 지녔던 윤동주는 ‘쉽게 씌어진 시’에서 그토록 혹독한 자기비판의 모습을 보였을 것이다. 오늘 생전에 친하게 지냈던 영근 형의 13주기를 맞아 새삼스럽게 시 쓰기의 무게감에 대해서 생각해 본다.
오늘 추모 행사가 열리는 부평 신트리 공원에 가면 반가운 얼굴들을 많이 만나게 될 것이다. 살아 있는 시인들은 스스로를 고립시키는 자발적 격절을 은근히 즐기는 부류들이라서 다양한 생각의 사람들을 한 자리에 모으기가 불가능에 가깝지만 모두가 기억하는 죽은 자들은 언제나 허다한 사람들을 한 자리에 불러 모은다. 오늘 나도 그 부름을 받은 것이다.
[소묘]
오랜만에 만난 염무웅 선생님과 명함을 교환했다. 7십대 후반의 연세에도 불구하고 선생님은 여전히 강강하셨다. 오늘 참석자들 중에는 인상 깊은 분이 한 분 계셨다. 공원을 주변을 무대로 그림을 그리는 화가 박진수 선생이었는데, 그분의 조부는 독립운동가였고 아버지는 조선공산당 당원이었다고 한다. 그분은 인사를 하며 울먹이셨는데, 아마도 아버지의 전사를 이야기할 때 감정이 북받쳤던 모양이었다. 염무웅 선생은 KAPF를 언급하며 박진수 선생과의 만남을 특별한 인연으로 받아들이는 것 같았다.
제5회 박영근 작품상 수상자는 조성웅 시인이었는데, 심사위원장이었던 염무웅 선생은 심사평에서 김남주와 백무산, 그리고 박영근의 시세계를 잇는 건강한 시인의 출현을 반긴다는 취지의 말씀을 해주셨다. 조성웅 시인은 수상 소감에서 “혁명하는 사람, 바로 그가 시인이다.”라는 김남주 시인의 말을 인용하여 참석자들을 일제히 숙연하게 만들었다. 생긴 모습도 무척 건강해 보였고 눈빛도 맑아 보였다.
축가는 콜트악기 방종운 위원장이 불러주었는데 노래 실력은 형편없었고 중간에 스피커 하울링 때문에 노래를 멈춰야 하는 해프닝도 있었지만 종운이 형 특유의 진정성 있는 눈빛과 목소리로 참석자들을 감동시켰다. 콜트악기는 현재 사측의 위장폐업을 상대로 10년 넘게 쟁의를 진행하고 있는 최장기 투쟁 사업장이다. 내가 그를 처음 만난 게 20대 후반이었고 그때도 그는 복직 투쟁을 하고 있었는데, 3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그는 공장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해고 노동자다. 이 땅의 노동현실을 몸으로 웅변하고 있는 것이다.
행사장 근처에서 1차 뒤풀이를 마치고 김창수 선배, 문화재단 손 팀장, 그리고 인권센터 은주와 함께 신포동으로 넘어가서 술 한 잔 더 하고 헤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