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절친 오석진, 어머니를 잃다
석진이가 어머니를 잃었다. 이제 내 친구 석진이는 고아다. 사춘기시절부터 가장 내 마음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배려해준 친구. 보통의 아이들과는 정서가 많이 달랐던 친구. 가출을 밥 먹듯 하고, 대학입시도 두 번 치른 친구. 선생들과도 결코 타협하지 않았고 강한 힘 앞에서 단 한 번도 비루해 본 적이 없는 친구. 내가 가장 어려웠을 때 자기 일을 제쳐 두고 앞장 서서 모든 일을 해결해 주려고 노력했던 친구. 그러나 결코 생색내지 않고 늘 겸손했던 내 친구. 결코 눈물을 보인 적이 없어 혹시 감정이 메마른 것이 아닌가 의심도 많이 받았던 친구. 그런 내 친구가 어머니를 잃고 고아가 된 것이다. 빈소는 아산 병원. 송파구는 인천에서 가기에 먼 거리다. 그러나 내 친구의 어머니는 내 어머니나 다름 없다. 버스를 타고 전철을 타고 또 걷고 걸어서 빈소에 닿았다.
오전이라서 그런지 빈소는 썰렁했다. 어머니의 영정 앞에는 향불이 없었다. 텅 빈 빈소를 조카로 보이는 학생 하나가 홀로 지키고 있다가 내가 들어서자 식당 쪽으로 가서 가족들에게 손짓을 했다. 그러자 석진이와 연수 누나, 그리고 제수 씨와 조카들이 일제히 빈소로 들어왔다. 표정은 생각보다 어둡지 않았다. 이미 예견하고 있었던 죽음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어머니께서는 오랫동안 일주일에 세 번씩 투석을 하고 지내오셨다. 노구에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을 것이다. 이북에서 내려와 이화여대를 졸업하고 대학교수의 아내로 살아온 짧지 않은 생에서 말년의 고통스런 삶은 회한이 되었을 것이다. 명민한 남편은 훌륭한 예술가였으나(조각가 오종욱 교수) 술을 좋아하는 자유인이었지 가정적인 남편은 되지 못했다. 개성 강한 자식들 역시 당신의 마음에 흡족한 삶을 살아준 것도 아니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 모든 삶의 질곡들을 묵묵히 가슴에 담고 살아야 했던 세월이었던 것이다. 그 어머님께서 어제, 지상에서의 모든 비루함과 굴욕을 마침내 털어버리고 결국 주님의 품에 안긴 것이다. 주여, 그녀의 영혼을 위로하시고 천국에서 영원한 안식을 누리게 하소서!
한 시간 반 남짓 석진이와 둘이서 밀린 이야기를 하고 12시쯤 자리에서 일어났다. 강남역에 도착했을 때는 갑자기 하늘이 검게 변하더니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다행히 버스가 때마침 도착해서 물에 빠진 생쥐 꼴은 면할 수 있었다. 버스가 출발하자마자 엄청난 기세로 소나기가 쏟아졌다. 그러나 시내를 벗어나 고속도로로 진입할 즈음 언제 그랬냐는 듯이 하늘은 맑게 개었다. 돌아와 문을 여니 울어머니 혼자 거실에 앉아 텔레비전을 보고 계셨다. 그냥 가엾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