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5월에는 늘 물기가 배어 있어 (5-17-토, 저녁에 비)

달빛사랑 2025. 5. 17. 22:33

 

80년 광주를 생각하면 여전히 눈물 난다. 당시 17살 소년이던 나는 이제 60대가 되었다. 비록 당시에는 광주의 실상을 몰랐으나 대학 시절, 비어처럼 소문으로만 떠돌던 광주의 실상을 접하고 난 후, 나의 삶은 완전히 달라졌다. 그건 자본의 세상에 편입하기 위해 책을 읽고 수업을 듣던 청년의 삶을 송두리째 무너뜨리기에 충분했다. 거리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진 시신들, 태극기로 덮인 즐비한 관들과 오열하는 노인들, 무장한 시민군과 무자비하게 진압하는 공수부대원들의 살기 띤 눈동자 등 컬러 TV 화면에 펼쳐진 그 살풍경한 장면들을 보는 순간 내가 생각하던 나라, 내가 꿈꾸던 미래는 사라졌다. 경악과 공포에서 시작해 분노와 오열, 섬뜩한 깨달음으로 이어진 스무 살 시절의 그 경험을 잊을 수가 없다.

 

경찰과 모든 정보기관이 왜 그리도 집요하게 광주항쟁의 실상을 담은 비디오 상영을 물리적으로 막으려 했던 건지 이해할 수 있었다. 우리는 비디오를 보기 위해 따로 사수대를 조직해 경찰의 침탈을 대비해야 했다. 매년 5월이면 전국의 대학에서 은밀하게 진행되던 상영회를 막기 위해 경찰은 매번 교내로 진입했고, 상영회를 조직했던 학생회와 동아리연합회 간부들은 수배되거나 구속되었다. 비단 나의 모교인 연세대만 경찰에 침탈당한 게 아니었다. 나는 광주 비디오를 인하대에서 보았다. 그 시절은 그저 비디오를 보는 것, 즉 진실을 확인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구속당할 만큼 황폐하고 천박한 시절이었다.

 

수천 명의 사상자가 발행한 항쟁, 공수부대원들이 시신을 은밀한 장소에 유기해 의문사 처리된 희생자들도 부지기수다. 하지만 그 모든 일의 배후인 전두환은 생전에 단 한 번도 사과하지 않은 채 호의호식하다가 자연사했다. 그의 자연사는 광주항쟁의 의미를 더럽히는 일이고, 광주 시민의 자존심을 훼손하는 일이며, 80년 당시 희생자들을 두 번 죽이는 일이었다. 그는 당연히 자기 죄에 걸맞은 처벌을 받았어야 옳았다. 그는 당연히 역사와 민중, 광주 시민과 희생자들 앞에서 무릎 꿇고 사과했어야만 했다. 그러나 그는 끝내 사과하지도 않았고, 살인에 합당한 처벌도 받지 않았다. 전 씨 부부는 백담사에서 고급 유배 생활을 했을 뿐이다.

 

우리는 일제 강점기의 잔재를 올바로 청산하지 못해서 얼마나 많은 비극적인 현대사를 겪어야 했는가? 광주 학살의 원흉들을 엄중하게 처벌하지 못한 탓에 여전히 일부 보수 우익의 팔푼이들은 광주항쟁이 북한의 소행이라느니, 폭도들이 일으킨 폭동이라느니 하며 갖은 망언들을 일삼는 것이다. 또 윤 씨와 같은 멍청이가 대통령이 되고, 그의 권력에 기대 호가호위하는 언론인, 종교인, 정치가, 유튜버들이 횡행하는 것이다.

 

따라서 역사의 가르침은 너무도 명확하다. 악의 세력과는 타협해선 안 된다는 것, 발본색원만이 답일 뿐이라는 걸 광주 이후의 역사는 웅변하고 있다. 광주의 진상이 낱낱이 밝혀지기 전까지는, 또한 책임자들이 합당한 처벌을 받기 전까지는, 설사 그들이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더라도 역사의 법정에 그들을 세우기 전까지는, 광주항쟁은 다양한 지역, 다양한 층위에서 다양한 형태의 투쟁으로 오늘도 현재 진행 중이다. 해마다 5월이 되면 광주의 영령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드는 건 이 때문이다.


친구 이호형의 딸 결혼식이 서구 아시아드웨딩컨벤션에서 있었고, 친구 최수동의 딸 결혼식이 송도 메리빌리아에서 있었으며, 친구 김종필이 죽었다는 부고를 받았다.  세 곳 모두 가진 않고 축의금과 조의금만 10만 원씩 보냈다. 아름다운 계절 5월이라고 결혼식도 많지만, 뜻밖의 부고도 많이 받는다. 죽음은 그리 멀리 있지 않다. 종필이가 떠나느라 어제는 비가 그리 많이 내렸던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