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획에는 없었지만, 괜찮았어 (4-28-월, 맑음)
컨디션이 안 좋아 쉬려다가 점심시간쯤에 출근했다. 오전에는 보운 형이 부탁한 업무를 대신 처리해 주느라 시간을 보냈고, 11시쯤에는 작가회의 사무처장인 옥 아무개 시인의 전화를 받고 그녀의 긴 하소연을 들어주었다. 하소연의 핵심은 현재 지회장을 맡고 있는 김 모 시인의 고압적인 태도와 사업에 대한 이해 부족으로 인해 조직이 여러모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것이었다. 특히 그는 다른 문학단체를 만난 자리에서 우리 조직을 깎아내리며 험담하기도 하고, 회원의 동의나 이사회의 판단이 필요한 중요한 안건조차 자기 맘대로 결정해 버리는 전횡을 일삼고 있다고 했다.
사실 지회장의 독불장군식 사업작풍에 대해서는 이전부터 여러 채널을 통해 들어왔던 터라서 새로울 건 없었는데, 다만 이사 중 상당수가 그의 행태에 반기를 들고 회의에 참석하지 않은 지 이미 오래되었고, 조직이 전반적으로 침체를 겪고 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화가 났다. 대통령 한 명 잘못 뽑아 우리가 얼마나 맘고생 했던가. 그런데 내가 속한 조직마저 회장 한 명으로 인해 엉망이 되어가고 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 너무도 화가 났다. 그래서 일단 이사들과 연락해서 문제를 공유하라고 조언해 주는 한편 나도 선배들과 연락해 해법을 찾아보겠노라고 약속했다. 대통령을 잘못 뽑으면 국민이 고생이고, 조직의 수장을 잘못 뽑으면 회원들이 고생하는 법이다. 우리가 어떻게 일군 조직인데…… 우울했다.
퇴근 무렵, 수홍 형의 전화를 받고 구월동 밴댕이 골목을 찾았다. 최근 책을 낸 유 박사가 수홍 형에게 전화했고, 술주정이 심한 유를 혼자 상대하기 부담스러웠던 형은 나에게 거의 읍소하다시피 하며 ‘구조 요청’을 한 것이다. 나도 썩 내키지는 않았지만, 수홍 형의 부탁도 있고, 메뉴(아귀찜)도 맘에 들어 약속 장소에 나갔다. 내가 도착했을 때 상 위에는 큼직한 아귀찜과 함께 데친 주꾸미와 전복회(오분자기 같기도 하고), 부침개, 해초무침 등 서너 가지의 반찬들과 맥주와 소주 한 병씩이 놓여 있었다. 손님은 우리 테이블뿐이었다.
다행히 유는 오늘 생각보다 조용했다. 오히려 수홍 형이 말도 많고 목소리도 높았고, 유는 조용히 듣거나 큰소리로 웃기만 했는데, 술잔이 거듭될수록 그 역시 말이 많아지고 특유의 취한 행동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때마다 수홍 형은 나에게 눈을 찡긋거리며 그만 일어나자고 신호를 주었다. 소주 3병에 맥주 4병을 마시고 일어나려 할 때, 그는 가방에서 최근 자신이 집필한 연구 서적을 꺼내 사인한 후 형과 나에게 건네주었다. 출판사는 자신의 아내가 대표인 ‘다인아트’였다. 몇 년 걸리긴 했지만, 책을 쓴 걸 보니 맨날 술만 마신 건 아닌 모양이었다.
2차를 가자고 유(劉)는 간곡하게 부탁했지만, 수홍 형과 나는 취기를 핑계로 술자리를 거절했다. 마시려 들면 못 마실 것도 아니었지만, 무엇보다 유가 취한 것 같았고, 나도 피곤해서 더 마시고 싶은 생각이 들진 않았다. 하지만! 간신히 그와 헤어져 예술회관 쪽으로 걸어오는데, 수홍 형이 불쑥 “문 시인, 지난번 나랑 나 소장이랑 셋이 갔었던 간석동 카페 있잖아? (‘산’을 말하는 것이었다) 거기 가서 이미자 노래 들으면서 맥주 한 잔씩만 더하고 헤어지자고” 하는 것이었다. 아뿔싸, 결국 둘은 예술회관 앞에서 540번 버스를 타고 간석시장으로 향했다. 하지만! 정거장에서 내려 카페 쪽으로 걸어가다가 문득, 월요일은 카페가 쉬는 날이라는 걸 떠올렸다. 그 사실을 말하며 “형, 아무래도 오늘은 그냥 가야겠다” 했더니, 형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한 호프집을 발견하고 손으로 가리켰다. 집요한 수홍 형의 음주 의지를 꺾을 수 없어, 결국 카페 ‘산’ 바로 뒤편에 있는 호프집에 들러 한치 안주에 병맥주 각 2병씩을 마셨다.
그곳에서 형은 속엣말을 많이 해주었다. 최근 K 선배와 S를 중심으로 준비되고 있는 문화모임을 언급하며 그들의 작풍에 대해 매우 신랄하게 비판했다. 나도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으나 묵묵하게 듣기만 했다. 그는 말끝마다 “유치한 ○○대학 놈들”이라고 말했지만, 그들이 지금처럼 방자하고 음모적으로 변한 이유는, 그들이 특정 대학 출신이라서가 아니라, 그들이 지닌 지독한 선민의식 때문이거나, 자신들도 모르게 몸에 밴 (문화) 관료주의의 흔적, 혹은 문화 권력에 대한 욕망 때문이라는 걸 나는 알고 있다. 내가 알고 있다는 것을 그들도 또한 안다. 그래서 그들은 나를 매우 불편해하고 있고, 그들의 모임에서 나를 배제하려 하고 있다. 귀찮은 일을 하지 않게 해 주어 나는 무척 고맙다. 다만 나는 그 얼치기 욕망의 화신들 속에 한때 존경했던 K 선배가 속해 있고, 더 나아가 그들의 좌장 역할을 맡고 있다는 사실이 슬프다.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우리가 그토록 비판하고 경계했던 교활한 관료주의자와 추한 문화 권력가의 모습을 닮아가고 있다. 나 자신도 엄중하게 스스로 돌아보며 살필 일이다. 모름지기 시인이 시정의 잡배 같은 문화 건달들과 뇌동해서야 되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