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일, 그리고 사람들 (9-5-목, 비)
결론부터 말하면, 올해 내 생일은 그런대로 괜찮았다. 내 생일은 대체로 그날 시간 되는 선배나 후배, 또는 우연히 연락이 닿은 누군가와 술 한잔 하는 게 다였다. 심지어 아들에게조차 연락도 없던 적이 여러 번이다. 나도 아들의 생일을 챙기지 않으니 피장파장일 수도 있겠으나, ‘그래도 나는 아비고 저는 자식인데’라고 생각하며 서운함을 느꼈던 게 사실이다. 하지만 올해 생일에는 아들이 전화도 하고 용돈도 30만 원이나 부쳐주었다. 허, 참, 오래 살고 볼 일이다. 나중에 알고 보니 큰누나가 아들에게 “수현아, 오늘 아빠 생일인데, 알고 있지? 가보지는 못하더라도 전화나 문자로라도 축하한다고 연락해라”라고 문자를 보냈다고 한다.
누나는 내가 생일인데도 아들의 연락조차 받지 못하고 쓸쓸하게 생일을 보내는 게 아닌지 걱정됐을 것이다. 그래서 그런 ‘선의는 이해하나 불필요한 오지랖’을 부리신 거겠지만, 아무튼 그렇게 문자를 보냈더니 아들은 “알고 있습니다, 고모. 퇴근해서 연락드릴 거예요.”라고 바로 답장을 보냈더라며 누나는 내게 “걱정하지 마, 동생. 수현이가 다 생각하고 있더라고. 다시 한번 생일 축하해”라는 문자를 보내왔다. 내가 걱정할 게 뭐 있다고……. 문자를 보는 순간 피식 웃음이 나왔다. 실제로 아들이 내 생일을 기억하고 있었고 정말로 퇴근 후 나에게 연락하려 했는지 아니면 고모의 문자를 통해서 비로소 알게 되었고, 민망함을 떨쳐내려고 고모에게는 이미 알고 있다는 거짓말을 한 건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어떤 경우라도 난 상관없다. 결과적으로 아들은 정말로 내게 전화했고 용돈까지 주었으니까. 만약 모르고 있다가 누나(고모)를 통해 알게 되었다면 누나의 오지랖이 내게는 큰 선물을 준 셈이다.
아들은 전화해서 건강에 좋은 기능성 매트와 소고기 선물 세트 중 무엇이 더 좋으냐고 물었는데, 다른 때 같았으면 나는 “괜찮아. 전화해 준 것만으로도 고마워”라며 사양했을 텐데, 이번에는 “음, 글쎄” 하고 고민하는 척하다가 “그냥 현금으로 줘. 내가 필요한 데 쓸게”라고 했더니 아들은 어려운 고민거리 하나가 해결됐다는 듯한 목소리로 “그럴까? 그럼. 알겠어요.”하고 전화를 끊자마자 문자로 30만 원을 보내왔다. 나는 “고마워. 잘 쓸게.”라는 짧은 답장을 보냈다. 아이도 나름의 의무 방어전을 효과적으로 치렀다는 만족감을 느꼈을 테고, 나 또한 아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고 덤으로 용돈까지 받았으니 올 생일은 그런대로 만족스럽게 보낸 셈이다.
오후에는 은준과 작가회의 시인들인 병걸, 김림, 심명수, 이언주 등과 함께 제물포역 뒤편 해물탕집에서 조촐하게 술 마셨다. 내 생일과는 무관한, 그 전부터 잡혀 있던 약속이었다. 은준이 일부러 영월까지 가서 사 온 막걸리와 메밀전병, 배추전 등과 술집에서 주문한 낙지전골을 안주로 제법 많은 양의 술을 마셨다. 식당 바로 앞이 명수네 집이라서 일행들은 그곳에서 한 잔 더 하기로 했다. 나는 잠깐 앉아 있다가 버스 시간을 핑계로 일찍 나왔다. 비가 내렸는데도 공기가 무겁고 뜨거웠다. 9시 50분쯤 집에 도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