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 더 얇아진 여름 (8-26-월, 흐리고 소나기)
놀랍고도 고맙다. 가만히 앉아 있으면 에어컨을 켜지 않아도 땀나지 않는 날씨였다. 공기가 한결 가벼워졌다. 여름의 몸피도 얇아졌다. 출근길에서도 평소보다 땀을 적게 흘렸다. 오전 9시가 넘으면 인천시청역은 썰렁해진다. 시청과 교육청으로 출근하는 직장인들이 모두 출근을 마쳤기 때문이다. 나는 9시 10분쯤에 시청역을 나왔다. 출근하는 사람들로 북적였던 에스컬레이터가 썰렁했다. 맞은편에서 내려오던 사람 두 명이 나와 교차될 때까지 내 뒤로 따라오는 사람이 없었다. 출구를 빠져나와 청사까지 걸을 때도 나 혼자였다. 전철역이 뱉어낸 그 많은 사람들이 특정 시각 이후로 어디론가 일제히 사라져 보이지 않게 되는 일이 나는 매번 재미있다. 오늘처럼 썰렁한 역사를 빠져나올 때는 마치 숨바꼭질 놀이의 술래가 된 듯한 기분이다.❙
날은 종일 흐렸다. 그렇다고 비가 장하게 내린 것은 아니다. 점심 먹고 돌아와서도 한참은 그냥 흐린 하늘만 낮게 내려앉고 있었다. 책상 위의 화초에 물을 주고, 문자와 카톡 메시지를 확인할 때마다 자주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오후 내내 비를 기다렸다. 만약에 오늘 비 내린다면 요 며칠 내린 비와는 결이 다른 비일 거라고 생각했다. 앞서 내린 비는 오히려 날씨를 더욱 고온다습하게 만들었으나 만약 오늘 비 내린다면, 이 비는 분명 가을을 재촉하는 비일 거라고 생각한 것이다. 마침내 첫 번째 소나기가 오후 2시 30분쯤 내렸다. 장대비는 아니고 마른 먼지를 톡톡 건드리는 약한 소나기였다. 그러나 4시쯤에 쏟아진 두 번째 소나기는 시원하게 내리는 장대비였다. 창문을 열고 손을 내밀어 빗물을 받아 보았다. 따듯했다. 그래도 반가웠다.❙
두 번째 소나기가 내리기 시작했을 때, YK의 전화를 받았다. 처음에는 누구인지 몰랐다. 그래서 그녀가 "여보세요" 했을 때, 나는 "누구세요?" 하고 물을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어머, 선배! 저예요. ○○이. 시청에 일이 있어 왔다가 선배 생각나서 전화했어요. 시청 주차장이 만차라서 교육청 주차장에 차를 댔어요. 지금 사무실에 계신 거지요?" 하며 무엇이 우수운 건지 막 웃었다. 그녀의 웃음은 늘 환하다. 그녀는 "일을 보는 데 한 시간쯤 걸릴 거 같아요. 일 마치면 다시 연락할게요." 했다. 나는 그러라고 하고 복도로 나가 창밖을 보았다. 비는 다시 보슬비로 바뀌어 있었다. 소나기도 그녀의 전화도 모두 반가웠다. 8월의 소나기로 여름은 조금 더 얇아졌을까. 아마 그럴 것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퇴근 무렵까지 YK의 전화를 기다렸지만 오지 않았다. 사무실을 나서며 '그럴 리가 없는데'라고 생각하며 '3층(내 사무실)에 올라왔다 가지 왜 그냥 갔어? 아무튼 건강 챙기면서 잘 지내' 하고 문자를 보냈더니, 전화를 3통이나 했는데 안 받아 그냥 갔다는 답장이 왔다. 전화기를 확인했는데, 들어온 부재중 전화 기록이 없었다. 그걸 캡처해서 보냈더니 그녀 역시 나에게 전화했던 기록을 캡처해서 보내주었다. 정말 3통의 발신 기록이 남아있었다. 희한했다. 가끔 이런 일이 벌어진다. 이유는 모르겠다. 암튼 그래서 "지금 나에게 전화 걸어 봐. 연결되나 확인해 보게"라는 문자를 남겼더니 그녀는 이내 전화를 걸었다. 청사 현관 앞에 우두커니 선 채로 오래도록 통화 했다. 만나지 못해 아쉬웠지만 목소리라도 대화할 수 있어서 좋았다.❙
전철역으로 가다가 미경의 전화를 받고 발길을 되돌려 오랜만에 갈매기에 들렀다. 그녀와 함께 막걸리 2병과 소주 한 병을 마시고 돌아오는 길에 혁재와도 통화했다. 어디냐고 물었더니 간석동 라이브카페 '산'에 있다며 오라고 했다. 멀지 않은 곳이어서 들렀더니 혁재는 바텐에서 사장 내외와 술 마시고 있었다. 사장은 성격이 무척 좋아 보였다. 초면이지만 “지금부터 형님이라고 부르겠습니다” 하며 살갑게 대해주었다. 라이브카페 사장답게 직접 악기를 연주하며 노래 두 곡을 불러주었다. 수준급의 솜씨였다. 술집 분위기가 괜찮아 자주 들를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혁재도 “형, 술 마시고 싶을 때, 갈매기 가지 말고 여기 와서 술 드세요” 했다. 술을 섞어 마신 탓에 취기가 밀려와 혁재와 사장님에게 양해를 구하고 먼저 돌아왔다. 집에 도착할 때쯤 혁재가 잘 들어갔느냐며 전화해 주었다. 오늘은 정작 보려던 사람은 못 보고 계획에 없던 두 명의 후배와 술을 마셨다. 정신없었지만, 살다 보면 이런 날도 있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