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왜 나를 떠올렸을까? (6-25-화, 맑음)
잠을 설쳐서 피곤한 상태로 출근했다. 오늘은 약속이 많은 날이었다. 일단 화가 JS의 요청을 받고 그가 곧 출간할 예정인 그림책의 텍스트를 검토해 주러 점심시간을 이용하여 그의 집을 방문했다. 계산역 5번 출구로 나오면 3분 거리에 있다는 말과 달리 빠른 걸음으로 걸었는데도 10분이 넘게 걸렸다. 알량한 그늘이라도 보이면 바로 그 그늘 위에 몸을 포개고 걸었다. 둘 다 식사 전이어서 일단 식사부터 하기로 하고 집 근처 ‘백암순대’에 들러 순댓국을 먹었다. 국물이 깊었다. 가격은 구월동보다 비싼 10,000이었다.
그의 집은 생각보다 넓고 깨끗했다. 100인치 대형 텔레비전이 거실 벽에 걸려있고, 양옆으로 JBL 스피커와 고급 앰프가 놓여 있었다. 큰방에는 한눈에 봐도 고가인 오디오 시스템이 설치되어 있었다. 이 오디오는 그가 송림동 살 때 본 적이 있다. 몇 년 전, 우리는 그가 갑자기 집과 차와 고가의 오디오를 사들이기 시작했을 때 유산을 상속받았거나 로또에 당첨됐을 거라고 예상했다. 나중에 누군가에 진짜 그가 로또에 당첨됐다는 말을 들은 것도 같다.
아무튼 JS는 오랜 기간 불면증과 조울증을 앓아 왔고 오늘 들은 얘기로는 초기 치매 진단을 받기도 했다. 또한 어느 순간 안 좋은 일에 말려 재산도 상당 부분 탕진하고 자신과 주변을 돌보지 않은 채 폐인처럼 산다는 소문이 들려와 나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그래서 늘 그를 걱정하고 연민해 오던 터였다. 하지만 오늘 직접 그를 만나 집에 들러보니 집 상태도 깨끗했고, 건강도 좋아 보였다. 주변 환경에 영향을 받은 것 같았다. 계양산자락 바로 아래 사는 덕분에 자주 등산과 산책을 하고 집 앞 계양도서관에 들러 틈틈이 책을 읽는다고 했다. 그리고 동네 사람들과 음악감상 모임도 만들어 활동하고 있다고 했다. 모든 게 생각했던 것보다 양호해서 속으로 ‘괜한 걱정을 했네. 나보다 훨씬 윤택하고 알차게 사는데 말이지’ 하고 생각했다.
그의 글 ‘개미 무덤’은 자전적인 내용의 어른들을 위한 동화였다. 글은 괜찮았다. 다만 분위기가 다소 어두웠다. 하지만 그의 유년이 어두웠다면 글이 어두운 건 당연한 일일 것이다. 30여 쪽 되는 그의 동화를 꼼꼼히 읽고 몇 가지 내 생각을 말해주었다. 그도 수긍한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러저러한 이야기를 나누다가 그가 만들어준 상큼한 레모네이드를 마시고 청사로 돌아왔다. 2시에 영상활동가 철원을 만나기로 했기 때문이다.
철원이는 2시가 조금 넘어 사무실로 들어왔다. 학생문화예술교육에 관한 현안들을 이야기했고, 해당 화제는 담당 장학사들도 들을 필요가 있을 것 같아 중등교육과 예술교육 담당자들을 불러 함께 대화를 나누었다. 장학사들을 돌려보내고도 꼬박 두 시간 정도 더 이야기하다가 철원은 다음에 보자는 말을 남기고 돌아갔다. 철원은 현장에서 활동하는 영상활동가로서 교육청을 비롯하여 다양한 기관들이 업무 분담이라는 이유로 서로 책임을 떠넘기거나 임무를 방기하고 있다며 자주 한숨을 쉬었다. 보수적인 공무원 사회의 사업작풍을 직접 눈으로 목격하면 그는 아마도 여러 번 기함할 것이다. 그래도 철원이와 같은 고민 세력들이 있어야 교육도 예술도 발전하는 법이다. 그런 점에서 고민하는 그가 무척 대견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