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맨스그레이를 꿈꾸며 (3-25-월, 흐리고 비)
비는, 늦게 도착했지만, 봄비다웠다. 오래 내렸고, 재잘대고 속삭이고 사색하듯 내렸다. 다양한 모습으로 내리는 비를 나는 좋아한다. 여우를 기다리는 어린 왕자처럼 비를 기다리며 무척 설렜다. 하지만 오후 늦어서야 비는 내렸다. 설렘에 비해서는 다소 늦은 도착이었다.❚ 혁재에게 전화했으나 받지 않았다. 은준에게 연락할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대신 무선이어폰(삼성 버즈2 프로) 구매할 때 받은 영화 무료 다운로드 쿠폰이 있어서 그동안 찜해놨던 영화 50여 편을 다운로드하였다. 주로 고전 영화, 비평가들의 평이 좋은 영화 순으로 다운로드했다. 같은 영화의 경우, 용량이 큰 것을 선택했다. 해상도가 좋기 때문이다. 이미 본 영화들이 대부분이었고 보지 않은 영화들도 서너 편 포함됐다. '해리포터'나 '스타워즈', '혹성탈출'과 같은 시리즈물은 찾아보기 쉽게 날짜와 에피소드별로 정리해서 외장하드에 저장했다.❚ 그렇게 두어 시간을 보내고 창문을 열어보니 빗줄기가 제법 굵어져 있었다. 테라스에서 내려다 본, 비 내리는 거리가 보기 좋았다. 집 앞 수선집에 나오는 불빛이 빗물에 반사되어 반짝거렸다. 기온은 어제보다 뚝 떨어져 반팔차림으로 테라스에 나갔더니 팔뚝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바람도 제법 불었다. 그나마 공기가 좋아 다행이었다. 미세먼지 어플이, '공기질이 좋으니 맘껏 마시라'는 문자를 보내곤 했다. 공기 흡입 여부와 그 시기까지 알려주는 참 아름다운 세상이 아닐 수 없다. 기계의 지침대로 오랜만에 창문을 열어 환기했다.❚ 문학에 집중하기 위해 올해부터 주 이틀만 나가는 단축 근무를 시작했더니 시간이 많아졌다. 쓸 수 있는 시간이 많아졌다고 그 시간을 온전히 의미 있고 알뜰하게 보낼 수 있는 건 아니다. 오히려 더 무질서하고 나태해질 수도 있다. 집이라 피곤하면 쉽게 눕게 되고, 책보다는 영화나 유튜브에 집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집에서는 시간이 무섭게 빨리 흐른다. 획하면 오전이 가고 잠깐 졸고 나면 저녁이 되고, 밥 먹고 치우고 운동하고 일기 쓰다 보면 잘 때가 된다. 하루를 무척 허무하게 보내 마음이 불편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이러다 덜컥 늙고 병든 나를 거울 속에서 만나게 될까 봐 걱정된다. 늙은이 티를 안 내려고 의(衣)과 식(食) 등 다양한 측면에서 발버둥치고 있지만, 나의 발버둥이 얼마나 버텨줄지 알 수는 없다. 하지만 그래도, 그럼에도 나는 여전히 '로맨스 그레이'를 꿈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