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타지를 좋아하는 일 (3-9-토, 맑음)
친구 아들의 결혼식이 있었지만, 축의금만 보내고 참석하지는 않았다. 참석하려고 목욕하고 옷 입고 머리 다듬고 향수까지 뿌렸는데 식장까지 가는 길이 너무 멀었다. 절친 두어 명에게 함께 가자고 전화했더니 모두 다른 일정 때문에 참석이 어렵다고 했다. 현관까지 나갔다가 다시 들어와 장문의 문자와 축의금만 보냈다. 혼주들도 축의금은 들어오고 뷔페값은 절약되니 나쁠 건 없는 일이다. 상사(喪事)였다면 참석했을 것이다. 관계의 깊이를 고려할 때 친구도 나의 불참을 서운하게 생각하진 않을 것이다. 그런데도 나는 장황한 문자를 보냈다. 축하하는 말도 있었으나 대체로 가지 못한 걸 변명하는 문자였다. 보내놓고 보니 뭐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오전에 운동하며 넷플릭스에 올라온 최신 영화 <댐즐>을 감상했다. 내가 좋아하는 판타지 영화였다. 익숙한 배우(밀리 바비 브라운)가 나온 뻔한(영웅이 고난과 역경을 이겨내고 승리를 쟁취하는) 내용의 영화였지만, 나는 재미있게 감상했다. 본래 나는 판타지물을 좋아한다. 아마도 부조리한 현실을 잊고 싶기 때문일 것이다. 사실 이런 태도는 바람직하지 않다. 건강한 문제의식을 지진 사람이라면 현실의 부조리와 정면으로 맞서야 하기 때문이다. 회피는 정답도 대안도 될 수 없다. 그런 태도는 자신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현실의 부조리를 더욱 심화시키고 자신을 순응적 인간으로 만든다. 현실이 두려워 고민 없이 그것을 회피하는 삶을 사는 건 배부른 돼지의 삶과 다를 게 없다.
결국 판타지 영화는 나에게 현실을 잊게 해주는 당의정이다. 그 단맛에 빠져 나는 쓰디쓴 현실을 잊을 수 있다. 뉴스를 보지 않거나 판타지 영화에 몰입하는 마음의 기저에는 그런 비겁한 심리가 숨어있는 것이다. 아무리 애를 써도 우리가 사회적 인간인 이상 해당 사회의 모순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는 법이다. 어느 날 문득, 그동안 보지 않으려고 무진 애를 썼던 ‘바로 그 현실의 본색’과 우연히 마주하게 되었을 때, 우리는 미쳐버린 모습이거나 부조리한 사회에 완전히 순치되어 자발적으로 부조리의 양산에 동조하는 모습이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다. 섬뜩하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