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수화물 그랜드 슬램 (11-21-화, 맑음)
보운 형이 점심을 사준 것까지는 고마웠는데, 메뉴가 민물고기 어죽이었다. 일단 어죽 밑바닥에 국수가 깔려있고, 그것이 익는 동안 밀가루 반죽을 가져와 수제비를 떠 넣었다. 밥은 흰쌀밥이었고, 나중에 라면사리를 넣어서 끓여 먹었다. 형에게 용무가 있어 청을 방문한 세 명의 대우 GM 사무직 노동조합 간부들은 숟가락을 뜰 때마다 "기가 막히네요!"를 연발했다. 그렇게 맛있게 어죽(매운탕)을 먹는 그들 앞에서 "저는 혈당 관리 때문에 이렇듯 밀가루가 재료인 국수와 수제비, 라면 사리는 먹을 수가 없군요"라고 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식당에 오기 전에 보운 형은 "아참, 문 동지 밀가루 안 드시지? 메뉴를 바꿀까?" 하며 나의 의사를 타진했다. 연 사흘 동안, 술과 각종 안주, 라면까지 먹은 상황에 이튿날 어죽 한 끼 더 먹는다고 뭔 대수랴 하는 마음으로 나는 "괜찮아요. 오랜만에 나도 어죽 먹고 싶네요"라고 했던 터였다.
이 집은 박 비서실장 있을 때 비서실 식구들과 서너 번 왔던 곳이라서 그 맛을 기억하고 있었다. 역시 밀가루와 면이 들어가자 몸이 먼저 반응했다. '바로 이 맛이야' 하고 혀와 위장이 소리치는 것 같았다. 그리웠던 입맛을 기억해 낸 몸은 흥분했다. 그 순간 나는 맛과 몸의 반응에 정직해지기로 결심했다. 정작 보운 형은 공깃밥에 손도 대지 않았는데, 관리가 필요한 나는 오히려 공깃밥 한 그릇을 뚝딱 먹어치우고 국수는 물론 수제비와 라면 사리까지 몸이 원하는대로 집어넣었다. 아, 그 포만감이란..... 나흘째 이래도 되는 거야.
아무튼 행복했다. 사람들이 건강 관리할 때 가장 조심해야 하는 게 바로 입과 몸의 욕망이다. 그걸 알면서도 나는 스스로 그 욕망 앞에서 자발적으로 투항했다. 잠시 행복했다. 사무실에 돌아와 혈당체크를 했더니 식후 한 시간 수치가 190이 나왔고 2시간 후 혈당은 178까지 치솟았다. 다시 한번 '탄수화물은 거짓말을 안 한다'라는 사실을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아슬아슬하게 정상을 유지했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다.
오늘의 화룡점정은 퇴근 무렵, 비서실 김 주무관이 "보좌관님, 이 장학관님이 드시라고 사왔어요" 하면서 붕어빵 봉지를 우리 앞에 내밀 때였다. 결국 팥이 가득 들어있는 붕어빵 두 마리를 보운 형과 맛있게 먹었다. 아침에 미국 다녀온 한 장학관이 전해준 단맛의 결정체인 초콜릿 두 알로 시작해 점심 어죽을 거쳐 퇴근 무렵 붕어빵까지, 오늘은 그야말로 탄수화물의 그랜드 슬램을 달성한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