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쉽사리 하기 힘든 말에 관하여 (03-30-목, 맑음)

달빛사랑 2023. 3. 30. 20:17

 

쉬는 날이라서 느지막이 아침 먹고 화초들에 물 주고 있다가 갈매기 종우 형의 전화를 받았다. 농수산물센터에 왔다 가는 길인데 점심이나 함께 먹자는 것이었다. 아침을 늦게 먹은 탓에 별로 밥 생각이 없었지만 볕 좋고 포근한 전형적인 봄날, 모처럼 연락해서 밥 먹자는데 어찌 거절할 수 있었겠는가. 게다가 일부러 우리 동네까지 오겠다는데. 정확하게 한 시간 후 근처에 왔다는 매기 형의 전화를 다시 받았다. 어디를 갈까 고민하는데, 문득 늘 지나다니며 봐두기만 했던 우리 동네 맛집 '청솔밀면'이 눈에 들어왔다. 그곳에 가서 밀면과 물만두, 막걸리 한 병을 주문했다. 밀면의 맛은 괜찮았지만, 오래전 부산 누나 집을 방문했을 때 먹어본 '부산 밀면'이 아니라 메밀냉면에 가까웠다. 실제로 면발도 부산 밀면처럼 하얀색이 아니라 짙은색 메밀면이었다. 맛집은 맛집인지 계속해서 손님들이 들어찼다. 그 식당의 시그니처 메뉴는 '청송밀면'이라는 이름과는 달리 해물짬뽕인지 손님들은 하나같이 해물짬뽕만 주문했다. 푸짐하고 먹음직스러워 보이긴 했다. 

식사를 마치고 집 쪽으로 걸어오며 매기 형은 "내가 봄 타나 봐요. 봄이 오면 마음이 좀 그래. 어디 가서 커피나 한잔할까요?" 했다. 그래서 콩세알도서관 근처 카페에 들어가 아이스바닐라라테를 주문해 놓고 한 30분쯤 앉아서 담소를 나눴다. 원래 말이 없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오늘따라 리액션이 무척 컸고, 다변이었다. 카페 창가의 화초들이 예쁘게 꽃을 피운 게 눈에 들어왔다. 참으로 한가한 봄날의 오후였다. 카페를 나와 차가 주차된 곳까지 와서 "그럼 나중에 봐요" 하고 돌아서려 할 때, "저... 내가 문 시인에게 좀 어려운 부탁을 해야겠는데.... 다름 아니라 상인연합회 통장에 넣어야 할 돈 100만 원이 필요한데, 도와줄 수 있을까? 당장은 못 갚고 5월 말이나 돼야 갚을 수 있을 거예요." 했다. '아마 이 말을 하기 위해 오늘 밥 먹자며 우리 집 근처까지 왔던 거로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그렇다면 말할 시점을 타산하기 위해 얼마나 속으로 맘 졸였을 것인가. 나도 오래전 보증 건으로 힘들었을 때, 지인에게 돈을 꾸어 봐서 그 마음을 안다. 그래서 담백하게 그러마고 했다. 거절할 거라면 모르겠지만 해줄 바에는 흔쾌히 해주어야 상대도 맘 편할 것 아닌가. "그래요. 계좌번호 보내세요. 그리고 약속한 날에 꼭 갚아야 돼요." 하며 웃었더니, "당연하지. 고마워요" 하며 얼굴이 환해져서 차에 올랐다. 집에 들어오자마자 바로 송금해 주었다. 한편으로 '명색이 사장인데, 100만 원이 없다고? 저 양반 혹시 비밀리에 뭔 일을 벌이는 건 아니겠지?' 하는 생각이 잠깐 들기도 했지만, 설사 그렇다 한들 그건 내가 관여할 바는 아닐 터이다. 조만간 혁재를 불러 인천대공원에서 막걸리나 한 잔 해야겠다. 낮술 먹기 딱 좋은 계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