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조바심이 안 난다면 거짓말이지요 (03-02-목, 맑음)

달빛사랑 2023. 3. 2. 20:32

 

 

그럼요. 매사에 조바심 나지요. 60이 되기까지 도대체 뭐 하나 성취한 게 없다 보니 일모도원(日暮途遠)의 마음이 간절합니다. 겸손하게 말하는 게 아닙니다. 조급해지네요. 나이를 먹었다고 포부마저 없어진 게 아니다 보니 성취하려는 갈망은 있으나 그것을 이룰 길이 요원해 보이니 심란한 거지요. 저에게는 문학, 그중에서도 시가 그렇습니다.한때는 재주를 자랑하며 자만했습니다. 시를 쓰려고 공부하고 토론하고 지도받고 고민하하지 않아도 시를 쓸 수 있고, 시가 쓰이던 시절이었으니까요. 그 시절에는 "예술적 감수성과 재능은 타고나는 거지 공부한다고 얻어지는 게 아니라니까요. 다섯 살짜리 꼬마 천재 음악가보다 동네 음악 학원 원장님께서 훨씬 더 공부하고 연습하고 지도받았을 거 아닙니까. 하지만 누가 더 아름다운 음악을 연주할 수 있나요? 당연히 꼬마 천재지요."라는 말을 서슴없이 하고 다녔습니다. 마치 내가 천재의 반열에 있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에요.지금 생각하면 끔찍하지요. 너무 창피해서 닭살이 돋을 지경입니다. 하지만 그건 어릴 때니까, 여물지 않은 청년의 치기라고 치부할 수 있겠지요. 하나 지금은 노력도 하지 않고 공부도 안 합니다. 그러면서 글이 쓰이지 않는다고 불평만 하고 있습니다.분명 그 시절에는 반짝이는 감수성이 있었어요. 가슴이 뜨거웠고 생각이 젊었으며 미친 시대조차 긴장감을 조성하며 글을 쓸 수 있도록 강제했지요. 하지만 지금은 글쓰기 기제들이 훨씬 좋아졌고, 마음의 여유도 생겼으며, 책 읽을 시간도 넉넉합니다. 들고 다니는 태블릿 PC가 보급되었고 어디서나 인터넷이 가능해 마음만 먹으면 모든 자료를 쉽사리 얻을 수 있습니다. 굳이 만년필과 노트가 필요하지 않고, 글을 쉽게 수정할 수 있으며, 심지어 맞춤법도 알아서 자동으로 수정해 줍니다. 좋은 세상이지요.❚그 옛날 문청 시절에 이렇게 편리한 기제를 사용할 수 있었다면 어땠을까요? 호불호의 문제가 있겠지만, 분명 또 다른 글쓰기의 지평이 펼쳐졌을 거라는 건 자명합니다. 글의 완성도와 필기도구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거든요. 물론 육필로 쓰고 원고지에 어지럽게 교정하는 아날로그 정서를 좋아할 순 있겠지만, 그건 너무도 편리한 세상에 길들여진 요즘 사람들이 문득 가져보는 지난날에 대한 향수에 불과합니다. 지금은 당연히 다른 감성으로 접근할 순 있겠지요. 오히려 더 인간적이고 따스한 글쓰기가 육필 원고에서 완성될 수도 있을 거예요. 하지만 그건 호사 취미이거나 변주된 그리움입니다. CD의 완벽한 음악이 싫다며 "지지직" 소리 나는 LP를 턴테이블에 걸어서 듣는 심리 같은 거지요.❚아무튼 예전에 비해 글쓰기를 위한 제반의 조건이 좋아진 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왜 지금 나는 '일모도원' 운운하며 조바심을 느끼는 걸까요. 그건 외적 조건은 좋아졌지만 내 몸의 기계들은 이제 많이 낡아버렸기 때문일 겁니다. 가장 치명적인 것은 시력입니다. 책을 오래 볼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바로 기억력과 암기력의 감퇴합니다. 예전에는 한 번만 읽어도 들어오던 책의 내용이 이제는 서너 번 읽어야 들어옵니다. 그나마 한 번 붙잡은 책을 쉬지 않고 읽으면 내용을 쉽사리 파악할 수 있는데, 문제는 시력이 안 좋아져서 그렇게 오래 책을 붙잡고 있을 수 없다는 겁니다. 인풋이 없으니 아웃풋 역시 알량합니다. 감수성도 왠지 모르게 낡아버린 것 같은 느낌입니다. 뭔가를 고민하고 결론을 위해 끝까지 그 문제를 물고 늘어지기 위해서는 체력도 필요한데, 알다시피 체력도 옛날 같지 않습니다. 이렇다 보니 자꾸만 조급해지는 거지요. 딱 하나 조급함을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바로 욕망을 버리는 일이지요. 하지만 그게 어디 쉬운 일인가요? 어쩌면 그 욕망이 힘 빠지고 모양 빠진 늙은 나를 그나마 버티게 해주는 것일 수도 있으니 말입니다. 아무튼 생각이 많은 요즘입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만 여전히 순치되지 않는 승부근성은 가슴속에 남아 있기도 하고, 하여 가슴은 여전히 뜨겁다는 게 지금의 내가 의지할 수 있는 희망입니다. 

 

❚민주화운동센터에 가야합니다. 옛 선배들을 만나야 하거든요. 참 바쁜 하루하루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