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쉼보르스카, '선택의 가능성' (01-19-목, 맑음)

달빛사랑 2023. 1. 19. 23:35

 

선택의 가능성

ㅣ비슬라바 쉼보르스카

 

영화를 더 좋아한다.

고양이를 더 좋아한다.

바르타 강가의 떡갈나무를 더 좋아한다.

도스토옙스키보다 디킨스를 더 좋아한다.

인간을 좋아하는 자신보다

인간다움 그 자체를 사랑하는 나 자신을 더 좋아한다.

실이 꿰어진 바늘을 갖는 것을 더 좋아한다.

초록색을 더 좋아한다.

모든 잘못은 이성이나 논리에 있다고

단언하지 않는 편을 더 좋아한다.

예외적인 것들을 더 좋아한다.

집을 일찍 나서는 것을 더 좋아한다.

의사들과 병이 아닌 다른 일에 관해서 이야기 나누는 것을 더 좋아한다.

줄무늬의 오래된 도안을 더 좋아한다.

시를 안 쓰고 웃음거리가 되는 것보다

시를 써서 웃음거리가 되는 편을 더 좋아한다.

명확하지 않는 기념일에 집착하는 것보다

하루하루를 기념일처럼 소중히 챙기는 것을 더 좋아한다.

나에게 아무것도 섣불리 약속하지 않는

도덕군자들을 더 좋아한다.

지나치게 쉽게 믿는 것보다 영리한 선량함을 더 좋아한다.

민중들의 영토를 더 좋아한다.

정복하는 나라보다 정복당한 나라를 더 좋아한다.

만일에 대비하여 뭔가를 비축해 놓는 것을 더 좋아한다.

정리된 지옥보다 혼돈의 지옥을 더 좋아한다.

신문의 제1면보다 그림 형제의 동화를 더 좋아한다.

잎이 없는 꽃보다 꽃이 없는 잎을 더 좋아한다.

품종이 우수한 개보다 길들지 않은 똥개를 더 좋아한다.

내 눈이 짙은 색이므로 밝은색 눈동자를 더 좋아한다.

책상 서랍들을 더 좋아한다.

여기에 열거하지 않은 많은 것들을

마찬가지로 여기에 열거하지 않은 다른 많은 것들보다 더 좋아한다.

숫자의 대열에 합류하지 않은

자유로운 제로(0)를 더 좋아한다.

기나긴 별들의 시간보다 하루살이 풀벌레의 시간을 더 좋아한다.

불운을 떨치기 위해 나무를 두드리는 것을 더 좋아한다.

얼마나 남았는지, 언제인지 물어보지 않는 것을 더 좋아한다.

존재, 그 자체가 당위성을 지니고 있다는

일말의 가능성에 주목하는 것을 더 좋아한다.

비슬라바 쉼보르스카, 최성은 역, 『끝과 시작』, 문학과지성사(2007)


뭐 그리 대단한 일도 아니고, 지극히 개인적인 일이며, 초장에 너스레 떨기도 우세스러워 조용히, 은밀하게 진행하고 있었는데, 오늘로 2주째 접어드니 “오호, 어쩌면……” 하는 자신감이 살짝 드는군요. 연(煙)과 닿은 인연을 40년 넘게 이어오는 동안 결코 단 한 번도 시도해 보지 않은 일, 열에 여덟은 실패한다는 그 일, 그 어려운 일을 제가 하고 있습니다. 아직 금(禁)은 언감생심이고, 그저 절(節)해 보려 한다고, 어느 날 불쑥 불어온 낯선 바람에 잠시 마음이 움직인 거뿐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지만, 이거 제법 성취감 있는 일이군요. 쪼는 맛도 있고요. 욕심이 생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