액체괴물 되기 (01-14-토, 약한 비)
참석해야 하는 회의가 하나 있었지만, 못 간다고 연락했다. 많은 이유가 있었지만 구구절절 말하지는 않았다. 무엇보다 어제 오전부터 밤까지 만났던 사람 중 두 명이나 코로나에 감염되었고, (다행히 혁재와 미경이는 별 증상이 없었지만) 무척 피곤했으며, 그 회의가 그리 재미있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재미로 따지다면야 유튜브에서 '아이브'라는 신인 걸 그룹의 공연을 찾아보는 게 훨씬 재미있는 일이겠지. 아이유의 연애 이야기는 또 어떻고. 대한민국에서 정치 이야기만 빼면 온통 재미있는 일 투성이다. 정치도 코미디, 판검사와 경찰, 국회의원은 코미디언, 고위직 공무원은 하나 같이 사시(斜視)다. 눈치를 하도 보니 눈이 돌아간 거지 뭐. 웃을 일 없는 세상에 저토록 웃기는 놈들, 웃기는 일들 투성이니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아 유 해피? 하지만 이런 철없는 이기심을 던져버리고 조금만 이웃과 주변, 나아가 지구 공동체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면, 덜컥 겁난다. 너무도 두렵다. 상황이 예사롭지 않다. 오염되고 파괴된 자연은 계속해서 경고의 시그널을 보내고 있는데, 인간들은 도무지 신경 쓰지 않는다. 전쟁광 한 명 때문에 수백만 명이 고통을 당하고 자본의 탐욕 앞에 모든 것이 망가지는 이때에 모자라도 한참 모자라는 지도자를 둔 탓에 이곳저곳에선 아우성이 난무한다. 우리도 예외는 아니다. 민생고에 정신적 고통까지 덤으로 안고 살고 있다. 얼마나 애처로운가. 대통령이 동네 음주 모임 회장이냐고. 조기 축구회 총무야? 이런 놈의 세상에서 정신줄 놓지 않고 심지 굳게 산다는 일은 얼마나 대단하고 요원한 일이냐. 그저 몸도 맘도 다치지 않고 무탈하게 살고 싶은 게 가장 큰 소망이 되는 나라에서 제대로 살려면 어떡해야 하나. 붙잡아도 붙잡히지 않고, 손가락 사이를 자유자재로 빠져나가며, 붙어 있고 싶은 곳에 붙어 있을 수는 있으나 그렇다고 한 곳에 고착하지 않는 액체괴물이 되는 수밖에. '사는 게' 아니라 '되는 거'라는 게 핵심 포인트다. 내 의지가 아니라 환경이 그렇게 만들었다는 말이지. 변명 같이 들릴 거야. 알아. 들뢰즈 선생은 물론 '되기'를 무척 강조하셨지만, 나는 사는 게 더 중요하거든. 그런데 문제는 액체괴물이 되어야만 살 수 있다는 거야. 웬만한 강심장이 아니면 혹은 웬만한 명상가가 아니면 이 참혹한 현실을 견딜 수 없을 걸. 하긴 명상가가 명상이나 제대로 할 수 있을까? 아무튼 좀처럼 손에 잡히지 않고 쏙쏙 잘도 빠져나가는 액체괴물처럼 참혹한 현실의 공격을 요리조리 빠져나가야 살 수 있는 거라면 액체괴물이 될 수밖에 없잖아. 뉴스를 보는 게 두렵다니까. 뉴스를 볼 때마다 액체괴물이 되야겠다는 바람은 점점 커지거든. 비겁한 거 맞아. 상처가 커. 적어도 지금은 마음이 그래. 편안하고 싶어. 저 꼴 보기 싫은 인간들이 모두 사라졌으면 좋겠어. 지금 나는 방바닥에 납작하게 눌어붙어 있는 중이야. 어느 순간 의식조차 슬라임이 돼버릴지도 모를 일이야. 처참한 일이지만 가능한 일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