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2주기 기일 (01-08-일, 맑음)
전날부터 의식했기 때문일까, 오늘 새벽, 엄마가 눈을 감았을 것으로 추정되는 '그 시간'에 잠이 깼다. 일생 많은 시간 외로웠겠지만 아마도 그날 그 새벽, 나에 관한 걱정 때문에 차마 발을 떼지 못한 채 망설이다, 신이 내미는 손을 붙잡고 자꾸만 내 쪽을 돌아보며 이승의 강을 건너야 했던 바로 그 선택의 순간이 어쩌면 엄마에게는 가장 외로웠던 순간이었을지도 모른다. 그 새벽 내내 나는 철없이 쿨쿨 잠을 잤다. 엄마가 이곳을 완전히 떠날 때 나는 다른 꿈을 꾸고 있었다. 그 혼란스러운 꿈속을 나와서야 비로소 이번에는 엄마가 꿈속으로 들어가 버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때야 비로소 엄마를 잃었다는 두려움에 온몸을 오들오들 떨었다. "엄마, 엄마, 불쌍한 우리 엄마!" 소리쳐 불렀지만, 엄마의 굳게 다문 입과 눈은 열리지 않았다.
내 이성은 15분쯤 지나서야 마침내 엄마의 죽음을 사실로 인정했다. 이곳저곳에 전화하고 앰뷸런스를 부르고 목욕탕에 들어가 세수를 했다. 그리고 죽은 엄마를 거실에 남겨둔 채 면도도 했다. 면도하면서 앞으로 해야 할 일을 하나하나 확인했다. 면도는 떨리는 마음을 달래고 무언가에 집중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이후 모든 일정은 내 의지와는 무관하게 빈틈없이 진행됐다. 빈소가 차려지고 조문객이 찾아오고 빈소의 안팎으로 조화와 화환들이 2열 횡대로 정렬되기 시작했다. 조문객들이 찾아와 엄마의 죽음을 조상하는 순간, 엄마의 죽음은 사회적으로도 기정사실이 되었다. 누군가의 도움으로 지상에서의 마지막 단장을 마치고 엄마는 우리 앞에 잠깐 모습을 보였다. 엄마의 입술이 약간 벌어졌다. 벌어진 입술 틈 사이로 비친 틀니의 색이 유난히 하얬다. 몇몇이 오열했다. 이상하게 나는 눈물이 나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엄마의 얼굴을 만져보았다. 너무도 차가웠다. 그 느낌, 그 냉기, 그 창백한 낯빛이 엄마가 내게 남긴 마지막 이미지였다. 그리고 그 이미지는 여전히 생생해 불과 하루 이틀 전의 일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그 사이 허다한 기억을 괄호에 묶어둔 채 2년의 세월이 속절없이 흘러갔다.
오후 1시 30분, 아들이 나를 데리러 집에 왔다. 함께 기다리던 작은누나도 동행했다. 올해 고희가 된 큰 누나 내외는 자식들과 함께 식사하기로 해서 오지 않았다. 가족공원은 설을 앞두고 미리 다니러 온 성묘객들로 무척 붐볐다. 공기의 질은 좋지 않았지만 날은 무척 따뜻했다. 묘역 앞에 심어 놓은 향나무 가지들이 길게 올라와 있었다. 전지가 필요해 보였다. 10여 분쯤 지나서 동생 내외와 큰 조카가 도착했다. 묵도와 찬송을 하고 아우가 대표로 기도한 후, 6명이 묘역 앞에서 최근 자신의 동정을 돌아가면서 부모님께 전했다. 카이스트 박사과정에 입학한 큰 조카 소식과 제대를 일주일 앞둔 작은 조카 소식, 사내 인사과로 스카우트된 내 아들 소식 등 하늘에 계신 부모님이 들으셨다면 환하게 웃었을 게 분명한 기쁜 소식들이었다. 끝으로 주기도문을 외우고 약식 예배를 마쳤다. 묘역을 떠난 일행들은 만수동 고깃집으로 이동해 늦은 점심을 먹었다. 4시 조금 넘어 일행과 헤어진 뒤 아들의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와서는 긴긴 잠을 잤다. 깨어 일어나니 6시 40분이었다. 잠깐 예배하고, 우르르 몰려가 밥 먹고 수다 떨고 다음을 기약하며 헤어지고...... 우리가 고인을 추모하는 방식은 이렇듯 단조롭다. 다만 고인을 향한 마음은 진심일 것이다. 설날, 우리는 다시 만날 것이다. 엄마도 아버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