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권리와 배려, 그 사이 어디쯤 (12-19-월, 오후에 흐리고 눈발)

달빛사랑 2022. 12. 19. 22:11

여느 때와 같은 시간에 눈을 떴지만, 화장실을 다녀와서 다시 잠을 청했습니다. 일어났을 때는 8시, 두 시간을 더 잔 것입니다. 그래서였는지 몸은 한층 가벼웠습니다. 백신 접종 사흘째, 어깨를 만져봤더니 별다른 통증이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5차 접종도 별다른 부작용 없이 넘어간 것 같습니다. 다행입니다. 오늘도 날은 추웠습니다. 출근길에 만난 날씨는 무척이나 매서웠습니다. 하지만 모자를 쓰지는 않았습니다. 여학생들 대부분이 검은 롱 패딩을 입고 있어 멀리서 보면 흡사 김밥들이 종종 대며 걸어 다니는 것 같습니다. 재미있는 풍경입니다. 사실 겨울에도 치마를 입어야 하는 여학생들에게는 그만한 방한복이 없을 겁니다.

버스를 탈까 전철을 탈까 고민하다가 오늘은 다른 날보다 늦게 나왔기에 전철을 탔습니다. 8시 20분쯤의 전철은 그리 붐비지 않더군요. 역시나 전철 안에도 검은 롱패딩들은 많았습니다. 청사에 도착하니 8시 40분, 늘 7시 30분이면 청사에 도착하던 내가 8시 반이 넘도록 출근하지 않았더니 비서실장은 은근히 걱정했던 모양입니다. ‘비로소’ 불 켜진 내 방문을 열자마자 “뭔 일 있어요?” 하고 물었습니다. “출근 시간 9시보다 무려 20분이나 전에 왔는데 뭔 일은 무슨 뭔 일이요?” 했더니, 빙그레 웃더군요. 나도 웃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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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서 든 생각인데, 어떤 영화에선가 주인공이 “배려가 반복되면 그걸 권리로 착각한다니까”라고 말하는 장면을 보았습니다. 나의 경우를 영화 속 상황과 그대로 비교할 수는 없겠지만, 내가 평소 (정해진 출근 시간보다) 일찍 출근하고 비번일 때도 청에 나와 (경제적 대가 없이) 초과 근무하는 것은 청사의 동료들을 배려한 것이었고, 동시에 하루의 루틴을 이왕이면 부지런하게 조직해 보려는 의도였을 뿐입니다.

사실 직원은 정해진 출근 시간에 늦지 않으면 되는 거잖아요?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나의 출근 시간은 (배려하려는 내 의도와는 무관하게) 7시 30분이 되었고, 안 나와도 되는 날인데도 내가 보이지 않으면 동료들은 나를 찾습니다. 습관은 그렇게 무섭습니다. 사람들의 인식마저 고착되게 만든다니까요. 애초부터 내가 정석대로 출근하고 정석대로 연월차 내고, 비번인 날에는 출근하지 않았다면 동료들은 지금처럼 내가 안 보인다며 궁금해하거나 전화를 해대지는 않았을 겁니다. 게으른 사람이 어느 날 한번 부지런한 모습을 보이면 주변에서는 ‘와!’하며 감격해 줍니다. 반면 부지런한 사람이 어느 날 한번 풀어진 모습을 보이면 “뭔 일 있어요?” 하고 묻는 거지요. 주변도 상황도 길들이기 나름이라는 사실을 생각하게 만드는 대목입니다.

정시에 출근하고 정시에 퇴근하며 쉬고 싶을 때 쉬는 건 직원으로서 나의 정당한 권리입니다. 따라서 이 권리를 존중하지는 않고 내가 베푼 배려를 당연하게 생각하며 더 많은 배려 혹은 배려의 지속을 요구하는 일은 분명 월권입니다. 그렇다면 원래의 규칙대로 행동하게끔 그간의 루틴을 대폭 수정해야 하는 걸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못 견딜 만큼 불쾌하지 않거든요. 부지런한 사람으로 인정받는 건 좋은 일이잖아요. 그저 사고의 관성 때문이지, 동료들이 나의 일상을 간섭하거나 당연한 내 권리를 의무로 규정하려는 의도가 있는 건 아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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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생활은 참 어렵습니다. 사회적 동물로서의 인간은 어쩔 수 없이 다양한 사람과의 부딪침 속에서 자신을 규정하고 규정받게 되어 있습니다. 더불어 살기 위해서는 때때로 본인의 생각과 다르게 규정된 본인의 이미지도 수용해야 할 때가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다만 본인의 생각과 타인의 규정 사이의 틈을 좁히기 위해 노력할 뿐입니다. 그러한 노력이 상대의 마음을 움직여 그가 생각하는 나의 모습과 내가 생각하는 나의 모습이 일치할 때, 소통은 원활해지고 오해는 줄어들며 대화의 성과도 축적되는 것이겠지요. 물론 결코 쉽지 않은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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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4시를 지나며 하늘이 흐려지고 눈발이 날렸다. 올겨울은 유난히 춥고 눈이 잦다. 경인일보 이영오 사업본부장이 내 방을 찾아와 소책자 발간에 관한 자문을 구했다. 책을 만들어 본 경험에 기대 몇 가지 조언했다. 후배는 무척 고마워했다. 그에게서 2023년 달력과 32기가바이트 USB를 선물로 받았다. 오 특보와 정책기획조정팀장은 연수동으로 신모 구청장을 만나러 갔다. 저마다 분주하게 겨울 오후를 통과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