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예총 포럼ㅣ'민주야 여행 가자 심사' (10-27-木, 맑음)
정말 '10월의 어느 멋진 날'이란 말이 저절로 나오는 맑은 가을날이었다. 오전에는 조용한 사무실에서 가을 느낌 가득한 노래를 하염없이 들었다. 어제 특보들 만찬 자리에 일부러 가지 않았는데, 점심시간, 복도에서 만난 소통협력담당관인 신 모 선배가 "왜 어제 안 나왔어요?"라고 물었을 때는 몸살 때문이라고 둘러댔다. '재미없을 것 같아서요'라는 말이 튀어나올 뻔했다. 여든이 넘은 구청장 출신 어른과 59~60년생들 셋이 있는 자리에 참석해서 내가 무슨 말을 할 수 있었겠는가. 특히 그중 한 분은 너무 말이 많으시다. 30년 넘게 공무원 생활을 했던 분이라서 그런지 그분과 대화를 하다 보면 뭔가 위장된 친절함, 의례적인 예의 같은 게 느껴졌다. 과도한 자기 자랑은 덤이고. 점심은 구내식당에서 먹었다. 메뉴는 닭볶음과 순댓국. 식당에서 순댓국이 나온 것은 처음 있는 일인 것 같다. 물론 흉내만 낸 순댓국이었지만.
오후 3시, 민예총 사무처장의 엄살 가득한 전화를 받았다. "선배님, 시간 되시면 포럼에 참석해주시면 안 되요? 참석자가 너무 없을 것 같아서 걱정이에요." 하기에, "왜 직장 다니는 사람에게 자꾸만 연락하는 거야. 그리고 참석자를 생각했으면 시간을 조절했어야지. 한낮에 진행하면서 참석자가 적다고 노심초사하면 어떡해."라고 말을 하긴 했는데, 전화를 끊고 생각해 보니 '얼마나 걱정이 되면 나에게 전화를 했을까' 하는, 안쓰러운 생각이 들기도 했다. 나의 몹쓸 지병인 그놈의 대책 없는 '정' 때문에 결국 민예총으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포럼이 열리는 복합문화공간 해시에 도착하니, 오잉! 웬걸, 생각보다 많은 사람이 들어차 있었다. '이렇게 사람이 많을 줄 알았으면 안 와도 될 걸 그랬어'라고 생각하며 사무처장의 얼굴을 바라봤더니, 사무처장이 겸연쩍은 표정으로 웃고 있었다. 사실 그 자신도 몰랐던 것 같았다.
포럼의 발제자들은 주제에 살짝 발만 걸쳐놓았을 뿐, 이런 종류의 포럼이 요구하는 구체적인 실천 방안보다는 원론적인 이야기를 풀어놓거나 자신들의 성과를 백화점식으로 나열하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인천문화재단 이모 정책협력실장은 그 문제를 지적하며 애초의 주제를 환기시켰다. 비로소 논의가 구체화되기 시작했는데, 아쉽게도 나는 그때 사무실을 나와야만 했다. 인천민주화운동센터에 들러 대학생들의 민주주의 동영상 작품을 심사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3시간가량 앉아서 내용을 듣다 보니 광역과 지역 막론하고 무엇이 현안이고 또 무엇을 (우리는) 할 수 있는가가 어느 정도 정리되기는 했다.
7시, 2022년 인천 청년 민주주의 현장 탐방 '민주야 여행 가자!' PT 심의를 위해 인천민주화운동센터에 들렀다. 차가 막힐까 봐 민예총에서 일찍 나왔는데, 정거장에 가자마자 버스가 도착해 30분 일찍 도착했다. 발표는 정확하게 7시부터 시작되었다. 발표 순서를 정하는 추첨을 끝낸 학생들의 표정에서 긴장감보다 유쾌함이 느껴졌다. 심사위원으로서 마음이 훨씬 가벼워지는 순간이었다. 채용 면접도 그렇고 공모 심사도 그렇고 참가자(응시자)들이 긴장하면 심사위원의 마음도 더불어 무척 무거워진다. 누군가를 떨어뜨려야 하는 채용 면접은 흡사 죄를 짓는 기분이 된다. 그런 점에서 학생들의 밝은 표정은 나를 다소나마 안심시켰던 것이다. 그래서 그런 걸까, 오늘 참가한 팀은 모두 9팀, 한 팀당 10분씩만 발표를 해도 꼬박 1시간 30분이 걸리는 고된 심의 자리였지만 학생들이 내뿜는 특유의 열기 때문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발표에 빠져들었다. 또한 그들이 답사하고 조사해온 자료를 발표할 때는 문득 옛날 나의 학생 시절이 떠올라 마음이 울컥해지기도 했다. 젊은이들이 이 땅의 모순과 사회적 부조리를 혁파하고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산화해간 민주 노동 열사들의 이름을 말할 때는 눈물이 핑 돌았다. 아픈 역사를 기억하고자 하는 이런 젊은이들이 있기에 우리의 미래는 희망이 있는 것일 게다. 모두에게 상을 주고 싶었지만, 어쩔 수 없이 세 팀을 가려서 시상할 수밖에 없었다. 심사를 마치고 몸은 피곤했지만 마음만은 넉넉해져 센터를 나왔다.
우재 형과 전철역까지 걸어오면서 민예총 후배들에게 전화를 걸었더니 아직 뒤풀이를 하고 있다며 빨리 오라고 했다. 우재 형은 피곤하다며 먼저 가시고 나는 시청역에서 환승해 갈매기에 들렀다. 하지만 막상 도착해 보니 테이블에는 찬영이 내외만 앉아 있었다. "나 기다린 거야? 사람들 갈 때 그냥 가지 그랬어? 게다가 최 배우는 술도 안 마시잖아" 하자, "아이, 그래도 형님 얼굴 보고 가야지요. 술 한잔하셔야지요?" 하며 막걸리를 주문했다. 9시를 막 넘어가는 시간이었지만, 갈매기에는 손님이 우리밖에 없었다. '왜 이리 손님이 없는 거지?' 하는 나의 생각을 읽었는지 찬영이는 "조금전까지 혁재 형 있다 갔어요" 하는 것이었다. 막걸리 잔을 가져오던 형수가 그 말을 받아 "오혁재, 내일 생일이라고 아마 이 근처에서 로미 씨와 술 마시고 있을 거예요"라고 했다. 순간, 잘하면 혁재를 볼 수 있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막걸리 두 병을 마시고 갈매기를 나와 찬영이 부부를 먼저 보낸 후 혁재에게 전화를 걸었다. 혁재는 근처 주점 '휴'에서 상훈이, 로미와 셋이서 술 마시고 있으니 얼른 오라고 했다. "상훈이? 걔가 웬일이래. 그리고 나를 거치지 않고 다이렉트로 너희 커플을 만났단 말이지?" 웃으며 전화를 끊고 휴에 도착했을 때, 그들은 이미 고급 정종을 두 병째 비우고 있는 중이었다. 애인의 생일이라고 로미 씨가 단단히 준비한 모양이었다. 상훈이에게 "네가 웬일로 나를 통하지 않고 혁재를 만났어?" 하고 물으니 상훈이는"형, 난 잘못 없어. 로미 씨가 전화를 해서 나온 것뿐이야."라며 겸연쩍게 웃었다. "농담이야. 하루 이틀 본 것도 아닌데 직접 만나면 어때? 괜히 하는 소리지."라고 하자 로미 씨가 얼른 잔을 내밀며 "그렇잖아도 연락드리려고 했는데, 오늘 바쁘시다고 그래서 연락 못 드린 거예요." 하며 술을 따라주었다. "생일 선물도 준비하지 못했네." 하자 혁재는 "생일은 내일이에요. 그리고 선물은 무슨..... 나에게는 형이 선물이에요." 했다. 닭살 돋는 말이었지만, 싫지 않았다. 사실 까다롭고 까탈스러운 상훈이가 내가 사랑하는 혁재와 친하게 지내니 얼마나 좋은지 모르겠다. 게다가 로미 씨는 외로운 상훈이에게 이성 친구를 (될 때까지) 소개해 주겠다는 말까지 하는 것으로 보아 로미 씨도 상훈이를 잘 본 모양이다. 그 또한 고마운 일이다. '휴'에서 한 시간쯤 수다 떨다가 내일 공연도 있고, 할 일도 있어 후배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차 끊기기 전에 먼저 귀가했다. 도착해 보니 누나가 오리탕을 사다 놓고 가셨다. 먹고 자야 하나, 일어나서 먹어야 하나 고민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