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사랑 앞에서 서둘지 마라 (10-5-水, 맑음)

달빛사랑 2022. 10. 5. 00:13

 

지금은 봄이 아니지만, 문득 김수영 시인의 시 '봄밤'이 생각났다. 아마도 '애타도록 마음에 서둘지 말라/강물 위에 떨어진 불빛처럼 혁혁한 업적을 바라지 말라/개가 울고 종이 들리고 달이 떠도/너는 조금도 당황하지 말라/술에서 깨어난 무거운 몸이여'와 같은 시구 때문일 것이다. 시간은 결코 사랑하는 이들의 편이 아니다. 시간은 헤어짐의 아픔을 치유하는 데는 약이 될 수 있겠으나 그것이 사랑의 완성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이미 연정의 사과를 스스로 베어 문 사람은 돌이킬 수 없다. 희열도 아픔도 스스로 감당해야 할 몫일 뿐이다. 

 

어제는 혁재를 만나 술을 마셨다. 늘 그랬던 것처럼 약속한 건 아니다. 일주일 만에 갈매기에 들렀고, 언제나처럼 장사가 시원찮은 상황에 관한 이야기를 사장인 종우 형과 나누었고, 동화마을에서부터 한잔 걸친 혁재가 갈매기에 들러서 만난 것이다. 어제처럼 혼자 술 마시다가 혁재나 조구 형 등과 우연하게 조우하면 여우를 기다리던 어린 왕자의 마음처럼 가슴이 환해진다. 조구 형은 못 뵌지 오래되었고 사장을 통해서 안부만 듣고 있다. 갈매기에 들러 내 자리에 앉자마자 내가 하는 첫 질문은 항상 조구 형의 안부와 혁재의 동정이다. 사장으로부터 "조구 형, 엊그제 들렀어요."라든가, "오혁재는 어제도 밤 늦게 들렀던데......"라는 대답을 들으면, 다시 또 "조구 형 건강은 괜찮으시지요?" 하고 묻거나 "혁재는 건강에 문제 없대요?" 하고 묻는다. 사장으로부터 "특별히 문제는 없는 것 같아요"라는 대답을 들어야만 비로소 안심한다. 내 그리운 사람들이 오래 건강했으면 좋겠다.

 

 

상대방이 '화요일, 갈매기'로 약속을 잡은 경우가 아니면 화요일에는 좀처럼 갈매기에 들를 일이 없는데, 어제는 들렀다가 우연찮게 혁재를 만났으니 들르길 잘했다는 생각이다. 혁재는 약간 마른 듯했으나 여전히 유쾌했고, 여전히 사랑스러웠다. 갈매기에서 나온 후, 음악이 듣고 싶다는 혁재를 따라 근처 LP 카페 '비틀즈'에 들러 '갈 수 없는 고향', '북한강에서', 'Stand by your man' 등 3곡의 노래를 들었다. 카페 사장은 혁재가 신청하지 않았는데도 혁재의 음반에 있는 모든 노래를 틀어주었다. 손님이 우리밖에 없었기 때문에 노래들은 더욱 선명하게 들렸고, 가사의 모든 구절이 마음에 와 닿았다. 어제는 혁재도 취했는지 나와 함께 택시를 기다렸다. 갈매기든 어디든 술을 마시고 돌아올 때면 늘 혁재가 나를 위해 택시를 잡아주었지만, 어제는 내가 혁재를 위해 택시를 잡아주었다. 나 먼저 타고 가라며 강하게 사양했지만, 억지로 등을 떠밀어 태워 보냈다. 그가 가고 5분쯤 뒤에 나도 택시를 타고 귀가했다. 

 

갑자기 기온이 뚝 떨어졌다. 가을이 그만큼 깊어진 것이겠지. 올 들어 처음으로 전기장판을 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