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꽃대를 자르는 마음 (9-22-木, 맑음)

달빛사랑 2022. 9. 22. 00:43

 

집에서 기르는 화초 중 접란은 번식력이 워낙 좋아서 한 달에 한 번은 꽃을 피우고 꽃이 진 꽃대에는 어김없이 새로운 새끼 포기(뿌리가 있는)가 서너 개씩 매달린다. 이 종(種)은 그런 식으로 번식한다. 그러니까 한 꽃대에 매달린 벼의 모종 같은 새끼 포기를 흙에 심거나 수경을 하면 별다른 관리를 하지 않아도 쑥쑥 잘도 큰다. 늘어진 새끼 포기가 보는 사람에 따라 거미줄 모양으로도 보이고 리본 모양으로도 보이기 때문에 거미식물(spider plant)이나 리본 식물(ribbon plant)로 불린다. 나는 이렇듯 후박(厚薄)을 탓하지 않고 잘도 크는 접란의 생명력을 무척 사랑한다. 특히 접란은 공기를 정화해주고 아토피에도 좋다고 하니 여러 면에서 대견한 화초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앞서도 말했듯이 이 아이의 번식력은 상상을 초월하기에 가끔은 그 모든 ‘새끼 포기’를 감당할 수 없어 가위로 잘라 내 헝클어진 화초의 머리를 정리해 줘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봉두난발’의 모습이 되고 만다. 하지만 매번 가위로 꽃대를 자를 때마다 살아 있는 생명에게 몹쓸 짓을 하는 것 같아 마음이 불편하다. 이 아이들이 내 마음을 알아줄까 걱정이 되어 가위를 댈 때마다 망설이게 된다. 정원사의 마음도 나와 같을까?

 

사실 나는 가끔 정원사의 전지(剪枝) 행위가 과연 나무와 꽃들을 위한 것인지 의심스럽다. 단지 인간의 시선으로 볼 때 아름답게 보이라고 가지를 잘라내는 건 아닌지 의심스럽다는 말이다. 자연은 그 자체 법칙에 따라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는 법이다. 그런 나무와 화초 본래의 생멸(生滅) 법칙에 인위적으로 가위를 대는 게 어떻게 나무와 화초를 위한 일이겠는가? 하여, 굳이 나의 전지 행위를 화초를 위한 것이라고 변명하지 않으려 한다. 나는 솔직히 거실 장 위를 어수선하게 하고 허구한 날 꽃을 떨궈 바닥을 더럽히는 게 싫어서 꽃대를 자르는 것이다. 그렇다면 당연히 화초에게 미안해 할 일이지 않겠는가?

 

오늘 아침 나는 거실로 나와 베란다 문을 열며 헝클어진 접란의 꽃대들을 보고는 별다른 죄책감도 없이 그 ‘미안한 짓’을 했다. 다만 잘린 꽃대에 매달려 있던 새끼 포기들은 고이 물병에 꽂아주었다. 어느 정도 자라면 화분에 옮기거나 분양할 예정이다. 화초든 반려동물이든 생명 있는 존재와 더불어 살아가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순간의 결단과 많은 책임이 뒤따르는 일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