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일 거센 장맛비
끝난 줄 알았던 장맛비가 종일 내렸다. 출근할 때는 추적추적 내렸으나 정오를 지나면서 주룩주룩 내렸다. 비만 오면 널 뛰는 마음을 다잡느라 무진 애를 썼다. 점심은 전, 현직 비서실장과 유치원연합회 회장, 특보들이 함께 먹었다. 백반 정식집에서 오랜만에 집밥다운 집밥을 먹었다. 민어탕과 돼지고기 두루치기, 각종 생선과 게장까지 네 사람이 먹기에 과하다 싶을 정도로 많은 반찬이 나왔다. 열어 놓은 식당 창문 밖에서는 장맛비가 시원하게 내리고 있었다. 근무 시간만 아니라면 반주 한잔했으면 딱 좋았을 시공간적 상황이었다. 빗물이 흐르는 길 위를 철벅거리며 걸을 때도 신포동이나 인천역 근처 허름한 주점에서 내리는 빗물을 바라보면 막걸리를 마셨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비가 내리는 풍경을 바라볼 수 있는 술집이면 금상첨화라고 생각하면서……. 식당에서 나와 근처 카페에 들어가 바닐라 라떼를 마셨다. 손님이 우리뿐이어서 고즈넉했다. 통유리창 너머로 빗물이 튀었다. 모두가 교육계 현안을 심각하게 이야기할 때 나와 보운 형은 창밖으로 내리는 빗물만 말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비가 참 예쁘게 내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래전 기억들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비 내리는 날이면 매번 떠나게 되는 추억 여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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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교 시절, 오늘처럼 아침부터 비가 내리는 날이면 학교로 곧장 가지 않고 교문 진입로에서 왼쪽으로 방향을 틀어 자유공원을 오르곤 했다. 멀리 월미도와 인천항이 빗물과 안개 너머 희미하게 보이던 아침 자유공원은 비현실적으로 보일 만큼 아름다웠다. 가끔 우리 집보다 세련된 비둘기 집 안에선 잠 깬 비둘기들이 구구구 울었다. 맥아더 동상 앞 작은 광장에서 모교의 담장을 오른쪽에 놓고 공원 산책로를 한 바퀴 돈 후, 천천히 언덕을 내려와 교문을 들어서면 이미 조례가 끝나 있거나 1교시 시작 종이 울리곤 했다.
조례는 빠졌지만, 다행히 1교시 시작 전에 도착했을 때는 고색창연한 별관의 남쪽 끝에 있던 교무실 문을 스스로 열고 들어가 담임 앞에 서곤 했는데, 그때마다 선생님은 야단치기보다는 “오늘 산책은 어땠어? 무슨 생각을 하며 걸었어?” 하고 웃으며 물어보신 후, 특별한 지시 사항도 없이 “돌아가 수업 준비해” 하셨다. 그게 다였다.
젖은 양말만 신경 쓰였을 뿐, 당시에는 선생님의 배려가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 알지 못했다. 세월이 한참 흐르고 난 뒤에야 비로소 그것은 한 소년의 예민한 감수성을 지켜준 너무나 고맙고도 비범한 배려였음을 알게 되었다. 철들어 찾아뵙고 싶었지만, 내가 졸업한 후 선생님도 이내 교직을 그만두셔서 만나 뵐 수가 없었다. 게다가 나에게도 무척이나 험하고 버라이어티한 20대의 질풍노도가 시작되기도 했고…….
고교 시절, 날 서고 지향 없는 마음에 상처를 줄 수 있는 기제들은 수도 없이 많았다. 만약 그것들 앞에서 무방비 상태였다면 그 이후 내 삶의 색과 결이 어떻게 변했을지 가늠할 수 없다. 하지만 나를 ‘무조건’ 이해해주신 은사님들 덕분에 다행히 나는 (당시에는 용인 되던 평균치의 구타와 체벌을 당하긴 했지만) 큰 정신적 외상 없이 사춘기의 터널을 통과할 수 있었다.
이후 내가 범상치 않게 다채로운 삶을 살아오면서도 시심(詩心)을 포기하지 않을 수 있었던 근원적 힘은 분명, 오래 전, 나의 갈무리 되지 않은 감수성을 인정해 주시고 지킬 수 있도록 도와주신, 고2 담임 김창수 선생님, 고3 담임 한승수 선생님 등 모교의 자애로운 은사님들로부터 비롯된 것임에 틀림없다. 그래서 남들은 '결코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은 시절'이라 말들 하지만 나에게는 고등학생 시절이 ‘하고 싶은 모든 것을 할 수 있었던’ 가장 빛나고 용감했던 시절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종일 비 내리니, 그때, 그곳, 그분들이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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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승수 선생님, 몇 년 전, 졸업한 지 얼추 40년 가까이 되어 고3 담임이셨던 선생님을 이곳 페이스북에서 만났다. 그 사이 선생님도 시인으로 등단하시어 시집을 내셨다는 걸 알게 되었다. 선생님께서는 자신의 시집(『손톱을 깎으며』)을 손수 나에게 부쳐주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