쓸쓸함은 나의 친구ㅣ책상 구매
밤새 내리던 비는 오전 10시쯤 그쳤지만 해가 난 것은 오후가 늦어서였다. 집 밖으로 한 걸음도 내딛지 않고 보낸 하루였다. 연세문학회 시절 문우들은 오늘 원주에 살며 농사를 짓고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는 원재길 선배의 그림 전시회에 참가한 사진을 SNS에 올렸다. 스무 살 시절에 만난 그들은 이제 모두 중장년들이 되어 있었지만, 여전히 옛 모습은 남아 있었다. 그렇게 맘만 먹으면 훌쩍 떠날 수 있는 사람들이 부럽다. 나는 언제라야 이곳을 떠날 수 있을까. 여행과 사람과 떠들썩한 자리를 좋아하던 내 모습은 사라지고 나는 이제 자발적 히키코모리가 되었다. 그렇다고 우울증을 앓거나 자신을 스스로 혐오하지는 않지만, 이제 나는 떠들썩한 만남과 술자리, 외출이 망설여진다.
내가 집 밖으로 나서질 않자 쓸쓸함이 스스로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것은 제멋대로 집안을 휘젓거나 내 책상 앞에 앉아서 키보드를 두드리기도 하고 책장에 꽂힌 책들을 둘러보다 가곤 했다. 어떤 때는 내가 잠자리에 들 때까지도 돌아가지 않고 방 안에 머물다 아침이 돼서야 비로소 사라졌다. 또 어떤 때는 내 옆에 같이 누워 슬픈 노래를 부르다가 힘들게 든 잠 속까지 따라오기도 했다. 사실 나는 쓸쓸함을 의식적으로 끌어안으며 허전함의 길고 긴 낭하를 스스로 걸어 다니기조차 했는데, 쓸쓸함은 그런 나의 행태를 몰랐던 것 같다. 시인에게 쓸쓸함은 독약이 아니라 바다가 보이는 카페에서 혼자 마시는 진한 커피 맛 같다는 걸 왜 몰랐을까.
가끔, 이를테면 오늘처럼 비가 갠 오후 6시쯤이나 밤 10시를 지날 때 문득 사람이 그리워지기도 한다. 그럴 때면 음주에 대한 유혹이 온몸을 사로잡는다. 나에게는 늦은 밤, 심지어 이른 새벽에 전화해도 기꺼이 만나 술 마셔 줄 사람이 두어 명은 있다. 나와 비슷한 병을 앓는 그들은 나의 갑작스러운 전화를 오히려 반가워할지도 모른다. 그럴 때 냉장고 안에서 오래전부터 면벽 수도하며 뚜껑이 열릴 날을 기다리는 서너 병의 소주가 생각난다. 하지만 한밤중에 냉장고를 열어 술병의 뚜껑을 열어 본 적은 거의 없다. 생각은 생각일 뿐이다. 노년의 십수 년을 홀로 한낮의 적요 속에서 나를 기다린 엄마도 있었다. 엄마의 외로움을 생각하면 나의 쓸쓸함은 사치스럽게 느껴진다. 쓸쓸할 때는 단 빵을 먹거나 사탕을 먹는다. 달착지근한 맛이 입 안에서 사라질 때까지는 쓸쓸함을 잊을 수 있다. 생각해 보면 그건 참 애잔한 의식 같다.
120*60*72 크기의 탁자를 구매해 기존 책상의 측면에 연결했다. 크고 넓고 견고한 보르네오 책상을 이미 가지고 있지만, 창문 앞이라서 그런가 (아니면 책상과 몸이 닿는 부분이 곡선으로 되어 있어 그런 건가? 잘 모르겠다. 이런 모양은 사실 인체공학적으로 설계된 것일 테지만, 아무튼) 이상하게 그 책상에선 자료 편집이나 인터넷 서핑, 영화나 동영상 감상만 할 뿐이지 독서나 글쓰기가 안 된다. 오히려 글쓰기는 이제껏 머리맡에 있는 탁자에서 하거나 거실 식탁에서 주로 했다. 그래서 4각 테이블을 하나 사야겠다고 마음먹고 있었는데, 잡곡을 사려고 들어간 홈쇼핑 사이트에서 우연히 이 제품을 만났다. 가격(6만 원)도 저렴해 고민하지 않고 구매했다. 조립한 후 기존 책상과 연결하고 보니 정면이 흰 벽이라서 그런가 집중도 잘 되고 디자인도 예뻐서 무척 맘에 든다. 노트북과 22인치 모니터, 독서 등(燈), 작은 화병 하나, 인터넷 공유기가 보기 좋게 자리하기에 딱 적당한 크기다. 눈과 모니터 간 거리도 멀지 않아 메인 책상에 있는 27인치 모니터보다 오히려 워드 작업물의 가독성도 좋고 눈도 어지럽지 않아 맘에 든다. 술을 안 마시니 쇼핑하는 횟수가 많아졌다. 하지만 책상 대용 테이블은 잘 산 거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