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권의 책
두 권의 책을 구매했습니다. 대학 때 문학회 활동을 같이했던 고영범 선배의 최근 저서들인데요, 하나는 자전적 성격의 장편소설이고, 다른 하나는 그가 수년에 걸쳐 연구하고 있는 레이먼드 카버의 시들을 번역한 책입니다. 학교 다닐 때부터 그는 연극, 영화, 문학, 그림, 음악 등 다양한 방면에 관심을 보였고, 또 그만큼 조예가 깊었습니다. 독서의 힘이었을 겁니다. 졸업 후에는 미국에서 영화를 공부하고 돌아와 국내 대학에서 영화와 연극을 강의하기도 했고 몇 해 전에는 희곡상으로는 상당한 권위가 있는 ‘벽산 희곡상’을 수상하기도 했습니다. 오래전 미국으로 이민 가서 현재까지 미국에 머물고 있지만, 이민 간 이후에도 국내 예술계 인사들과 계속 교류해 왔으며 가끔 귀국했을 때는 옛 연세문학회 동료들과 만나 함께 시간을 보내다 돌아가곤 했지요. 나도 2년 전 그가 잠시 귀국했을 때, 신촌에서 문학회 동료들과 함께 그를 만나 원없이 수다를 떨다 돌아온 적이 있습니다.
오랜만에 만난 형은 여전히 사변적이었고 소년처럼 말이 많았으며 지적인 호기심이 넘쳐났습니다. 다만 눈매는 상당히 순해진 것 같더군요. 사실 그를 처음 보는 사람들은 그가 무척 다가가기 불편하고 지나치게 냉소적이라고 말을 합니다. 실제로 까칠하고 매사에 냉소적인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친한 사람들은 그 냉소와 까칠함 뒤에 숨어 있는 그의 박물학적인 지식과 유머를 은근히 즐깁니다. 특히 그는 진부한 것에 대해 신경질적인 거부 반응을 드러내기도 하는데, 그게 가끔 상대를 불편하게 하고, 오해를 불러 일으키곤 합니다. 아무튼 다가가기 편안한 사람은 아니지만, 일단 친해지면 매우 재밌고 대화의 즐거움을 느끼게 하는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되지요. 그러면 그의 까칠함과 냉소가 사실은 단점이 아니라 그를 그답게 만들어주는 매우 큰 매력이라는 것도 아울러 알게 됩니다.
그동안 그의 희곡, 영화나 연극 저서들은 이미 만나본 적이 있지만, 소설은 처음입니다. 작년, 레이먼드 카버 연구서를 출간하고는 갑자기 페이스북에서 사라지더니, 1년이 지난 어느 날, 그는 두 권의 책을 가지고 우리 앞에 다시 나타났습니다. 카버의 시를 번역한 책도 흥미가 가지만 그보다 더욱 관심을 끄는 건 그의 소설입니다. 아직 다 읽지는 못했지만, 작품에는 그의 입담과 감수성, 박물학적 지식과 영화나 연극적 사고가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습니다. 또 나와 비슷한 또래라서 그의 자전적 작품 속 시간은 나의 시간과 거의 일치했습니다. 공감할 수 있는 내용이 많았다는 것이지요. 절반 정도를 읽은 지금, 문장이 장황한 측면이 없지 않아 있지만, 그의 감수성과 세밀한 묘사는 질투를 느낄 정도로 좋았습니다. 페북에서 사라졌던 1년은 그간 조금씩 정리해왔던 작품을 최종적으로 손을 봐서 완성하는 시간이 아니었나 생각됩니다. 아무튼 다시 한번 자극을 받았습니다. 남들은 척척 책도 잘 내는데 나는 뭐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는 말이지요. 이런 자괴감은 결국 성실함의 문제로 귀결되곤 하는데, 이런 감정에는 내성도 안 생기더군요. 만약 내성이 생기는 것이라면 나는 아마도 슈퍼항체 보유자일 겁니다. 조금 더 분발해야겠어요. 늘어짐과 추진력 차이는 정말 백지 한 장 차이거든요. 적어도 나에게는 그렇습니다. 해야겠다고 맘을 먹으면 나도 제법 추진력이 있는데, 희한하게 그리 마음을 먹는 게 쉽지 않습니다. 그래도 간만에 좋은 문장을 만난 건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형의 한결같은 건필을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