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가빴던 2월을 보낸다
명예퇴직하는 박 보좌관은 오늘이 근무 마지막 날이다. 하지만 개학을 맞은 학생들에게 나눠줄 진단 키트 소분 작업을 위한 인력 확보를 위해 오늘도 동분서주하며 상황을 체크했다. 수십만 개의 키트를 분류하는 작업은 예사로운 일이 아니다. 교육청 직원들은 토요일과 일요일에도 청사에 나와 소분 작업을 해야 했다. 불만의 목소리가 터져 나오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다시금 '초등학교는 몰라도 중고등학교는 각 학교로 내려보내 교사들에게 분류하게 하자'라는 의견이 터져 나왔다. 분위기를 보니, 모르긴 몰라도 내일이나 모레쯤 작업은 임계점에 이를 것이고, 결국 학교로 키트를 내려보내게 될 듯하다. 왜냐하면 제한된 교육청 직원들과 턱없이 모자란 자원봉사자들로는 수십만 개의 키트를 소분하는 일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이미 경기도 교육청과 서울시 교육청은 그렇게 조치했다. 그러다 보니 직원들 사이에서는 비교하게 되고 불만이 터져 나올 수밖에. 심지어는 교육감이 선거를 앞두고 학부모와 교사들의 눈치를 보는 게 아니냐며 볼멘소리를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청사 직원들은 업무가 마비될 정도의 하중을 받고 있는데, 자신들의 고충에는 왜 무관심한 거냐고 항변하고 있는 중이다. 들어보면 다 일리있는 말이다. 그러나 현재는 누가 옳고 그르냐를 따질 때가 아니다. 일단 눈앞의 불은 꺼야 하는 것이고, 벌어진 일은 수습해야 하는 게 급선무다. 어떤 결정을 내려도 한쪽으로부터 비난을 받을 수밖에 없다. 지나치게 좌고우면하다 보면 모든 일을 그르치게 될지도 모를 위기의 상황이라는 말이다. 모두가 치르는 전쟁에서 손에 피를 안 묻히려 안간힘을 쓰거나 인기에 영합하려 한다면 그가 바로 적으로 간주되는 상황이다.
점심은 한 장학관과 함께 먹었다. 박 보좌관과 같은 과학 교사 출신이고 전교조 활동을 같이 해온 터라 한 장학관은 박 보좌관과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친한 사이다. 한 성질 하는 그녀는 스트레스를 받을 때마다 우리 보좌관실에 내려와 화를 삭이다 가곤 했다. 일단 푸념을 늘어놓고, 욕을 한 사발 뱉어낸 후, "보좌관님, 제 마음 이해하시죠?"로 끝나는 게 그녀의 스트레스 해소 루틴이다. 그만큼 박 보좌관을 친한 선배이자 오빠처럼 의지하고 따르던 그녀이다 보니, 이번에 박의 명예퇴직 소식에 가장 상심하며 반대한 것도 바로 그녀였다. 오늘 점심은 청에서 선배와 함께 하는 마지막 점심이었던 셈이다. 물론 교육감이 재선에 성공하고 다시 박 보좌관이 교육감의 교육 개혁을 돕기 위해 청에 다시 돌아오는 게 그녀가 그리는 최고의 그림이지만, 사람 일은 모르는 거니까 함부로 단언할 수 없는 일이다. 나 역시 나이도 같고 말이 통하는 박 보좌관이 다시 청으로 돌아왔으면 좋겠다. 하지만 그는 일단 쉬고 싶다고 말한다. 많이 지쳤을 것이다. 그동안 그가 담당해 온 일이 많이 피곤한 일이긴 했다. 노사문제 만큼 민감한 일은 없을 테니까. 그래서 모든 걸 그에게 맡길 수밖에. 이래저래 안팎으로 심란한 일들은 많지만, 그래도 식사하고 돌아오다 보니 청사 곳곳에 봄볕이 가득했다. 부지런한 나무들은 새순을 내밀고 있었다. 때가 되면 어김없이 바뀌는 계절처럼 질곡도 난맥도 언젠가 그 끝이 있을 것이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 그리고 봄은 이곳에 있다.
퇴근 후, 후배 김창곤과 나, 박 보좌관이 함께 저녁 먹기로 했는데, 부디 무탈하기를 빌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