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의 마지막 날, 종일 비 내리다
11월의 마지막 날, 종일 비가 내렸다. 아침에 일어나 창문을 열고 환기를 시키며 내리는 비를 한참 바라봤다. 마음속에서는 몇 가지 해결되지 않은 일들이 결정을 기다리며 아우성을 치고 있었다. 엊저녁 혁재와 영택이는 대전까지만 내려오면 진안에서 그곳(대전)으로 픽업하러 가겠다며, 꼭 내려오라고 신신당부했다. 약속과 일정이 있는데도 나는 진안 (行)을 진지하게 고민했다. 그들과 산촌마을에서 보내게 될 시간은 쉽게 포기할 수 없는 유혹이었다. 하지만 내가 진안을 가게 되면 이곳에서의 두어 개의 일정은 엉망진창이 될 것이다. 이런 일일수록 명쾌한 답변을 해주어야 하는데, 나는 "알았어. 일정을 한 번 체크해 볼게"라고 말하며 다시 한번 선택 장애자로서의 모습을 보였다. 아침에 일어나 혈압약과 영양제를 챙겨 먹을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현심감각을 되찾았다. 고민 자체가 웃긴 일이었다. 무책임한 모습을 경멸해 온 나로서는 당연한 결정이었다. 그런데도 스스로 대견한 마음이 들었다. 고비를 넘긴 것이다. 이런 종류의 대견함을 자주 느낀다면, 그만큼 내가 자주 유혹에 든다는 반증이다. 아무튼 가지 않겠다는 결심을 굳히는 순간, 잠시 황당한 표정으로 물러나 있던 이곳에서의 일정과 약속들, 이를테면 출판기념회와 노동문화제 참석, 마감이 임박한 원고 등의 부담이 의기양양한 모습으로 다시 사고의 중심에 자리잡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것들은 내가 당연히 감당해야 하는 일들이다. 혁재는 1시쯤 전화를 걸어 "형, 내려오고 있는 거지요? 술, 얼마나 사다놓으면 될까요. 지금 사러 가거든요."라고 말하며 다시 한번 놀려댔다. 그것은 못내 아쉬운 마음을 그만의 방식으로 표현한 것이라는 걸 나는 안다. 그곳에도 비가 오냐고 물었더니, 진안에도 비가 많이 내리고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내리는 비를 보며 낮술을 마시는데 형 생각이 너무 나서 전화해 봤어요."라고 했다. 다른 건 몰라도 비를 보고 있노라니 내 생각이 났다는 말은 사실일 것이다. 비는 저녁무렵까지 계속 내렸다. 비가 그치자 바람이 불며 날씨가 급격하게 추워졌다. 11월의 마지막은 참으로 극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