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리는 나의 힘
...... 그리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하루였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건 고마운 건지 심심한 경우인지는 판단하기 쉽지 않지만, 아무튼. 다만 며칠 전에 옮긴 책 무더기가 맘에 안 들어 다시 원위치를 시켰다. 허튼짓도 이런 허튼짓이 있을까? 사서 고생을 한다는 말은 이럴 때 쓰는 말일 것이다. 어지럽게 널린 책들을 보며 하도 우스워서 혼자 키득키득 웃으며 책을 정리했다. 그래도 한번 했던 일이라서 그런지 지난번보다는 수월하게 일을 끝냈다.
책들을 정리한 후에는 컴퓨터 모니터 자리도 바꿨다. 책상에 놓여있던 모니터 중 22인치 모니터를 좌식 테이블에 있던 27인치 모니터와 위치를 바꿨다. 27인치 모니터는 대개 동영상이나 영화를 볼 때 사용하던 것이었는데, 최근 들어 눈이 현저하게 침침해져 큰 모니터로 바꾼 것이다. 하긴 영화는 거실 텔레비전에 노트북을 연결해서 봐도 되니까. 다만 거실에서 보다 보면 자꾸 소파에 누워서 잠이 들기 일쑤라는 게 문제이긴 하지만.
그리고 장 보러 갈까 하다가 귀찮아서 그냥 홈쇼핑(쿠팡 프레쉬)으로 필요한 것을 주문했다. '와우회원(한달에 2,900원을 내는 회원제. 가입하면 새벽배송을 해준다)'이기 때문에 내일 새벽 6시 전에 장을 본 품목들(저지방우유, 통밀빵, 잡곡, 쌀, 두부, 오징어젓갈, 진간장, 국간장)이 도착할 것이다. 얼마나 좋은 세상인가. 물론 누군가가 새벽잠을 포기한 결과일 테지만..... 그런데 알아보니 새벽배송만 전담으로 하는 배송 기사들이 따로 있다고 한다. 낮에도 일하고 밤에도 일하고 새벽까지 일하는 것은 아닌 것이다. 새벽배송이나 로켓배송에 익숙해지니 통상 사나흘 거리는 일반 배송은 무척 더디게 느껴진다. 그 전에는 당연하게 여겼던 것이 이제는 '빨리 빨리'에 길들여져 답답하게 느끼는 것이다. 인간은 길들이기 쉬운 동물이니까. 편리함과 관련해서는 더욱 더!
오후에는 인천아시아아트쇼 주최측으로부터 교육감 축사 요청이 왔다. 친구와 후배들이 조직하는 행사라서 인천교육청도 후원단체로 넣어달라고 부탁했더니 포스터에도 교육청이 들어가고 축사도 도록에 넣을 모양이다. 영어로도 번역해야 해서 내일아침까지 보내달라고 했다. A4 절반 분량이면 일도 아니라서 느긋하게 있다가 저녁에 써서 보내줬다. 마켓팅담당이사인 친구로부터 "필력은 여전하네." 하는 문자를 받았다. A4 반 장 분량의 글을 보고 필력 운운하니 멋쩍기는 했지만 기분은 좋았다. 교육감님에게도 보냈더니 "좋아요. 그런데 '삶의 힘이 자라는 우리 인천교육'인데, '우리'가 빠졌네요."라는 짤막한 답장이 왔다. 인천교육청 슬로건이 '삶의 힘이 자라는 우리 인천교육'인데, 내가 문맥의 자연스러움을 위해 (하도 '인천', '우리'라는 단어가 반복되면 글이 난삽한 느낌이 들기 때문에) '우리'를 의도적으로 뺀 건데, 교육감님이 그걸 지적한 것이다. 뺀 이유를 말할까 하다가 그냥 "예, 알겠습니다. '우리'를 넣어서 다시 보내겠습니다." 하고 답장을 보냈다. 원칙과 형식의 준수에 있어 한 조직의 수장과 부하직원은 감각이 다를 수 있을 테니까.
그렇게 무난하게 하루를 보내나 싶었는데, 늦은 밤 후배의 소설집 출간 문자를 받았다. 글쓰는 선후배들의 출간 소식을 들을 때마다 축하하는 마음 한편에 묘한 감정이 들곤 한다. '난 뭐하고 있는 건가' 하는 자괴감이 들기 때문이다. 물론 건강한 자극임에는 틀림없는데, 질투와 부러움도 수반하는 자극이라서 묘한 마음상태가 되는 것이다. 이 묘한 감정은 아마도 며칠 갈 것이다. 그 며칠 동안 나는 시상을 정리해 놓은 파일들을 찾아 읽으며 진지한 시인 모드가 되어 있겠지.
내일은 오랜만에 회의에 나가 그리운 사람들을 많이 만난다. 저녁 시간이니 술 한잔하게 되지 않을까 싶다. 교육청에도 오후 일정은 출장처리를 해놔서 다시 귀청하지 않아도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