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이 시대 ‘라떼족’을 위한 단상들

달빛사랑 2021. 9. 22. 0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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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여름 전북 진안으로 낙향한 후배 하나가 볼일 있어 서울 왔다며 밤늦어 전화했다. 며칠 전 페북에 올린 내 글을 봤다는 그는, 자신을 그토록 감성적인 인간으로 기억해줘서 고맙다고 했다. 그 글은 단골집에서 술 한잔할 때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던 윤도현의 ‘가을 우체국 앞에서’를 듣고 마음이 격동해 쓴 글이었다. 후배는 술자리에서 가끔 내가 구겨진 휴지처럼 방치되어 있을 때면 그 노래를 불러주곤 했다. 그날 휴대전화로 올린 예의 그 글은, 솔직한 내 마음의 일단을 드러낸 것이기도 하지만, 적당한 취기와 가을밤의 정취, 아련한 기억과 그리움이 버무려진 감상의 표백(表白)이었을 게 틀림없다. 그런데도 그 글을 본 후배가 고맙다고 해서 내가 오히려 고마웠다.

사소한 것에도 감동할 줄 아는 후배의 맑은 성정 때문이겠지만, 이처럼 가끔 한 사람의 말과 글은 그것을 듣거나 읽는 상대에게 의도하지 않은 감동을 주기도 한다. 물론 그 반대의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한쪽의 발화에 상대가 감응하기 위해서는 같은 용어를 사용하되, 그 용어의 표면적 의미만이 아니라 그것에 담긴 함의까지 동의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미사여구조차 상대의 심장을 베는 날카로운 칼이 된다.

 

2

한때 정치적 견해를 명백하게 드러내야 하는 활동을 했던 나로서는 나와 견해가 다른 이들에게 많은 상처를 주었을 게 분명하다. 어떤 경우는 작정하고 상대에게 상처를 주기 위한 발언을 했던 적도 있다. 논쟁의 시절에는 상대에게 강한 상처를 줄수록 나의 존재가 진영 내에서 강렬하게 각인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은근히 즐기기도 했다. 지금 생각하면 건강한 논쟁이었다기보다는 유치한 인정투쟁 같다는 느낌이 든다. 물론 그 팍팍했던 시절에는 그러한 소아병적 치열함이 해당 시대를 견딜 수 있게 한 힘이 되기도 했다. 진영을 결속하고 강화하는 데는 상대에 대한 집요한 공격만큼 효과적인 게 없었으니까. 세월이 많이 흘렀어도 당시의 관성은 여전히 남아 다양한 현장 속에서 작동하고 있다는 걸 확인할 때마다 쓴웃음이 나온다.

 

솔직한 속마음과 무관하게 자신에게 드리워진 정치적 색깔과 표명해 온 견해를 한순간에 뒤집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그것은 자신이 살아왔던 한 시기를 부정하는 일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를 비롯한 나이 든 왕년의 활동가 중에는 고집불통의 모습을 보이는 분들이 많은 것이다. 세월이 흘러 자신이 지양(止揚)하고자 했던 체제와 타협하며 살아가는 일은 그들에게 얼마나 모멸스러운 일일 것인가. 타협을 강요하는 현실의 거센 공격 속에서, 전선을 누비던 의연했던 활동가가 어느 순간 현실 부적응자의 모습으로 변해가고 있는 상황을, 상처받은 그들의 자의식이 어찌 덤덤하게 수용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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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 상황이 ‘투사(鬪士)’를 양산하던 시절에는 활동가 대부분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기가 쉽지 않았다. 따라야 할 원칙과 지향만 있을 뿐 다른 가능성을 진지하게 받아들일 마음의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한 시절을 지나오며 현실과 타협하지 않은 나이 먹은 활동가들은 상당수가 결국 ‘꼰대’가 되어 젊은 세대의 비아냥을 받곤 한다. “나 때는 말이야”로 시작하는 회고(懷古) 조 무용담을 입에 달고 사는 그들을 비꼬아 젊은이들은 “라떼족”이라 부른다고 한다. 사회 민주화와 노동자 민중을 위해 젊음의 한때를 기꺼이 바친 그들에게는 치욕스럽고도 서운한 말일 것이다. 하지만 자신들만의 용어, 자신들만의 기호를 고수하며 닫힌 세계 속에서 벗어날 생각을 하지 않는 한, 기성세대에게 채무가 별로 없는 지금의 MZ 세대가 라떼족의 서운함에 대해 별로 귀를 기울이지 않는 건 당연한 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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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나는 과연 ‘꼰대’와 ‘라떼’로부터 자유로운가? 대답이 쉽지 않다. 나 역시 어설프고 의욕만 앞세운다며, 젊은이들을 향해 자주 적대와 비아냥을 표현해왔기 때문이다. 서로 용어와 사고의 범주가 다름에도 불구하고 내 쪽의 용어를 이해하지 못하는 젊은이들을 향해 늘 혀를 차기만 했던 것 같다. 사실 이해와 설득 과정이 어디 세대 간의 관계에만 필요하겠는가. 남녀 간에도, 종교 간에도, 인종 간에도, 지역 간에도 상호 이해와 설득은 필요하다. 비단 젊은이들에게 비웃음당하지 말아야겠다는 이유 말고도,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기 위해서는 층위가 다른 다양한 단위들 사이의 대화와 설득, 이해를 위한 노력은 필요한 것이다. 그러니 이 땅의 모든 라떼족이여, 기억하자. “나는 꼰대가 아니다”라고 외친다고 해서 꼰대라는 오명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한때 세상을 바꾸기 위한 전위였으나 이제는 자신을 먼저 바꾸어야만 세상과 대화할 수 있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