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장마가 시작되다
눈을 떴을 때 6시가 넘은 시간이었지만, 창문 밖은 어두컴컴했다. 테라스 문을 열고 나가 보니 여린 화초들이 바람에 아슬아슬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간간이 빗방울이 떨어졌다. 시간이 지날수록 사위는 더욱 어두워졌다. 폭풍전야 같았다. 창문으로 비가 들이칠까 봐 서둘러 엄마 방의 열린 창문을 닫았다. 혈압약과 고지혈약을 챙겨 먹었다. 방안을 정리하고 아침 먹을 준비를 하기 위해 냉장고를 열었다. 순두부와 콩나물, 호박과 두부, 누나가 사다 놓은 명란과 낙지 젓갈이 있었다. 간단하게 콩나물을 국을 끓였다. 뉴스를 틀었지만, 전날과 다를 게 없었다. 다만 가을장마가 시작되었다는 일기예보를 보았다. 많은 양의 장맛비가 게릴라처럼 전국적으로 내릴 예정이니 물난리 방비를 철저히 해야 한다는 예보였다. 설거지를 끝내고 쉬고 있을 때쯤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대견하게 내리다가 점점 무섭게 내렸다. 하늘이 구멍 난 것처럼 퍼붓는 비였다. 대단한 우세였다. 그렇게 한 시간쯤 내리던 비는 어느 순간 얄밉도록 천연덕스럽게 뚝! 그쳤다. 데크레센도가 아니라 갑자기 뚝! 하고 멈춘 것이다. 그리고 모두 비워내 투명해진 대기 속으로 남은 여름의 뜨거운 햇볕이 내리쬐기 시작했다. 초가을 장맛비는 오후가 되면서 완전히 그쳤다. 나는 비가 내리는 동안 잠시 행복했다. 창문 가에서 우두커니 서서 내리는 비를 바라봤다. 우세가 거칠어질수록 경외감마저 들었다. 하지만 물난리를 걱정하지는 않았다. 하루 내내 비가 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오후에 혁재로부터 전화가 왔지만 받지 않았다. 어제 헤어질 때, 취한 눈으로 “형, 전화할게요.” 했던 걸 잊지 않았던 모양이다. 전화를 받으면 술 마시자고 내가 먼저 말할 것 같아서 받지 않은 것이다. 혁재에게 온 전화를 받지 않은 건 그를 알고 난 이후 처음 있는 일이다. 만약 오후에도 비가 내리고 있었다면, 아마 나는 분명 그와 약속을 잡았을 게 분명하다. 주간 예보를 보니 다음 주에도 내내 비가 내릴 모양이다. 마음 다치지 않고 빗속에서 내내 행복했으면 좋겠다. 가을이 장마와 함께 시작된 건 행복한 일이다. 공감능력이 없는 말일 수도 있겠지만, 현재 내 마음은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