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 밤 선배의 화실을 다녀오다
일찍 일어나 청소하고 빨래하고 반찬 만들어 놓은 후, 오랜만에 운동도 했다. 눈약 사러 약방 간 김에 이발도 했고 편의점에 들러 복권도 한 장 샀다. 공기가 좋아 환기도 시켰다. 화초들 물주고 뉴스를 봤는데도 오전 시간이 남았다. 희한한 것이, 이것저것 뭔가를 바지런히 하면 오히려 시간이 남고 아무것도 하지 않고 멍하니 있거나 유튜브나 힐끗거리다 보면 시간이 모자란다. 남들도 그러려나 모르겠지만, 나는 천성이 부지런하게 살아야 하나 보다. 하지만 엄마 방에서 아무것도 안 하고 멍하니 있는 건 무척 좋아한다. 하루 중 볕이 잘 드는 시간에 엄마 방에 앉아서 책을 보거나 글을 쓰면 기분이 좋아진다. 물론 여전히 엄마 방에서는 잠을 자지 못하지만.
오후에는 ‘찜한 영화’ 목록에 넣어놓고 보지 않았던 두 편의 영화를 보았다. 확실히 나는 슬픈 영화나 비극적 사실을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는 보기가 힘들다. 세월호 관련 영화나 광주 관련 영상을 보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 아마도 진실에 정면으로 마주할 용기가 없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귀찮고 더럽고 파렴치한 상황과 만났을 때 눈앞의 불편한 상황을 모면하고자 질끈 눈 감아 버리게 될까 봐 걱정이다. 정치 허무주의로 빠질 가능성이 짙다고 하겠다. 싫은 건 안 보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는 건 소시민의 모습이다. 소시민들은 수많은 양심적 시민들의 노력에 무임승차 하게 된다. 그들은 세상을 바꾸려는 노력은 하지 않고 수많은 양심적 시민들의 노력으로 획득한 민주주의의 성과는 함께 누리려는 이기적인 모습을 보인다. 내가 그중의 하나가 아닐까 생각하면 부끄러워진다.
도대체 그는 왜 나를 불러냈을까. 늦은 밤, 화가인 김 모(某) 선배로부터 “계봉 씨? 뭐 하세요.” 하는 문자가 왔다. 이후 둘 사이에 나눈 대화는 다음과 같다.
“지금 어디셔?”
“집인데요.”
“오늘은 술 안 마셨어요?”
“예, 오늘은 쉬었습니다.”
“왜 이렇게 약해지셨나?”
(사이)
“무슨 일 있으세요? 이 늦은 시간에 문자를 다 보내시고.”
“아니요. 그냥 그림 그리다가 옛날 계봉 씨랑 술 마시던 생각도 나고, 보고 싶고 그래서요.”
“형, 술 마셨어요?”
“아니요.”
“지금 어디신데요? 작업실에 있어요?”
“네. 혹시 이리로 오실 없나요? 새로 그린 그림도 보여드리고 막걸리도 한잔하고……”
“네, 알았어요. 그럼, 주소 찍어줘 봐요. 잠깐 들러보지요. 뭐”
“넵.”
대화를 마치자마자 택시를 잡아타고 갈산동 그의 작업실로 향했다. 작업실 근처 냉면 골목에 도착했을 때 그는 미리 나와 있다가 내 택시비를 대신 계산해주었다. 함께 편의점에 들러 막걸리 세 병과 간단한 안주를 샀다. 그런데 술을 안 마셨다던 그의 말과는 달리 그는 이미 약간 취한 듯했다. “에이, 술 안 마셨다고 하시더니 마셨네, 뭐.” 했더니 “딱 한 병 마셨어요.”라고 했다. 그 말을 믿지 않았다. 그는 한 병에 그리 취할 주량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는 작업실 문을 열며 “내 작업실에 누군가가 온 건 계봉 씨가 처음이에요.”라고 말하며 슬리퍼를 내주었다. 나는 일단 최근 작업한 작품들과 현재 작업 중인 작품을 유심히 봤다. 그동안 색연필 인물화에 집중하던 그였는데, 최근에는 풍경을 주로 그리고 있었다. 판결을 기다리는 수인처럼 그는 그림을 보고 있는 내 곁에 바짝 붙어 서서 어떤 대답을 듣고 싶어 했다. 나는 “좋네요. 다만 도시의 풍경으로 차와 건물만 있는 건 아니잖아요. 다양한 풍경들을 다루셨으면 좋겠어요.”라고 말했다. 그는 무척 고무된 표정으로 “그래야겠지요.”라고 했다. 거실로 나와 막걸리를 마실 때, 혁재로부터 연락이 왔다. 집을 나오며 혹시나 하며 문자를 넣었는데 답장이 온 것이다. 잠시 후 혁재까지 합류했다. 혁재는 이미 많이 취해 있었다. 선배는 혁재에게도 그림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싶어 했는데, 생각보다 혁재는 냉정하게 말했다. “형, 다른 건 다 좋은데, 차가 왜 이렇게 많아요? 그림 같지 않고 디자인 같아요.”라며 냉정하게 평했다. 역시 혁재다웠다. 그렇게 셋이 앉아 수다를 떨다가 선배가 많이 취한 듯해서 혁재와 둘이서 먼저 일어났다. 선배는 택시 타는 데까지 배웅해주었다. 돌아오는 길 혁재는 “사람을 불렀으면서 술을 넉넉하게 준비해 놨어야지. 무엇보다 주인이 먼저 취하는 법이 어딨어요.” 하며 투덜댔다. 나 역시 애타게(?) 부른 것치고는 다소 허무하게 끝나버린 만남이 아쉬우면서도 황당했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나를 불러낸 거지?’ 내가 내린 결론은, ‘술 마시다 취기가 돌자 분위기 잘 맞추는 내가 문득 생각났고, 술의 힘을 빌려 우발적으로 오라고 했을 거야.’라는 것이었다. 준비되지 않은 만남이었지만, 이렇게라도 나를 불러준 선배에게 고마워해야 하는 건지 아니면 그 즉흥성을 타박해야 하는 건지 판단이 서질 않았다. 야밤에 갈산동으로 부른 선배나, 선배가 불렀다고 두말 안 하고 갈산동으로 달려간(온) 후배(혁재는 잠자리에 들려고 누웠다가 내가 불러서 나왔다)나 피장파장이지만...... 하지만 맨정신이든 술 취했든 내가 그리워서 부른 거라니 일단은 고맙게 생각하기로 했다. 혁재와 나는 우리 집에 와서 소주 한 병씩 더 마셨다. 연이틀 종일 술을 마셔 파김치가 된 혁재는 무척 피곤했던지 작은 방에 쓰러져 자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