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참 정겨운 술집 '경희네'

달빛사랑 2021. 5. 21. 00:23

비가 많이 내린 어제 일이다. 글짓기 심사차 들른 경인일보사에서 우수홍 선배를 만났다. 오랜만에 만난 탓에 따로 약속하지 않아도 퇴근 무렵에 분명 술 한잔하자고 연락해 올 것을 알고 있었다. 예상은 적중했고, 갈매기에서 만났다. 혁재가 먼저 와 있었기 때문에 자연스레 합석했다. 전작이 많았는지 혁재는 나중에 도착한 우리가 한 병을 채 다 마시기 전에 취한 모습을 보였다. 최근 들어 자주 취한 모습을 본다. 그만큼 술이 약해졌거나 여전히 술을 많이 마시기 때문일 것이다. 혁재는 취하면 목소리가 커지고 욕설을 내뱉는다. 대체로 정치인이나 젠체하는 인물을 향해 육두문자를 날리는데 가끔 방향을 잃은 그의 적의는 술자리에 함께한 지인을 향하기도 한다. 나중에 그에게 술자리의 일이 기억나느냐고 하면 필름이 끊겼었다고 대답을 하곤 했는데, 요즘에는 “그럼요. 다 생각나요.”라고 대답한다. 물론 나는 그 말을 믿진 않는다. 그의 기억은 확증편향에 의한 단편적인 기억일 게 분명하기 때문이다. 나는 그의 분노와 적개심의 진정성을 믿기에 특별히 ‘지난밤의 주사’를 거론하지는 않지만, 속으로 걱정이 많이 되는 건 어쩔 수 없다. 세상과 사람에 대한 적개심이 많아진다는 건 그만큼 세상이 형편없거나 강퍅하기 때문이고 술로 인한 격정을 그가 다스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가 세상과 사람에 대해 싱긋 웃음을 보낼 때 그가 만든 노래들은 아름다웠고 그의 표정은 늘 평화로웠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혁재에게서 그런 표정이 사라졌다. 그것이 나는 안타깝다. 거지 같은 세상을 뒤집기는 요원하고, 다만 그의 높아진 목소리와 잦은 욕설을 듣는 일은 곤혹스럽다. 건강을 챙기라는 잔소리를 자주 해야겠다. 나는 혁재를 건강하게 오래 보고 싶다.


혁재가 하도 소리를 질러대는 바람에 수홍 형과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물론 혁재 때문만은 아니고 마실 만큼 마셨고 비도 예사롭지 않게 내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혁재가 골목 입구까지 배웅해주었다. 지하철 정거장으로 가다가 형은 “문형, 맥주 딱 한 병씩만 더하고 가자고.” 했다. 나는 “음, 나는 이미 얼근한데……. 그럼 맥주는 됐고, 경희 누나네 가요.” 해서 우리는 그야말로 ‘딱 한 잔’을 위해서 경희네로 향했다. 내 또래 손님 두 명이 술 마시고 있었을 뿐 실내는 한산했다. 들어가자마자 주방에서 안주를 만들던 경희 누나는 “어머, 계봉 씨. 보고 싶었어. 갈매기에서 오는 길이지?” 하며 환하게 맞아주었다. 그러면서 주문하기도 전에 이것저것 안주가 될 만한 음식들을 가져다주었다. 함께 일하는 누나의 친구분도 “아, 점잖은 후배 님 오셨구나.” 하며 반갑게 눈인사를 해왔다. 우리는 정말 맥주를 딱 한 병만 마실 생각이었으므로 안주를 따로 시키지는 않았다. 다만 수홍 형이 멸치를 부탁해, 누나는 똥과 머리를 뗀 멸치 한 접시를 가져다주었다. 비는 여전히 기분 좋게 내리고 있었다. 9시쯤 왔기 때문에 머물 수 있는 시간은 딱 한 시간뿐이었지만, 술자리는 무척 유쾌했다. 잔정이 많은 누나는 “계봉 씨, 이거 먹어 봐, 괜찮지? 맛있지? 내가 오이지 담그면 한 통 줄게 가져다 먹어.”라며 살갑게 대해주었다. 매상을 위해서 손님에게 보이는 의도적인 살가움이 아니라 정말 친누나 같은 모습이었다. 지난가을에는 게장을 한 통 맛있게 담가줘서 엄마와 한동안 잘 먹었다. 물론 고맙고 미안해서 게값으로 얼마간 주기는 했지만, 시세와는 비교할 게 아니었다. 갈매기 단골로서 받는 대접도 고맙긴 하지만, 경희네에 갔을 때 받는 환영은 갈매기의 그것과는 확실히 결이 다르다. 나를 단순한 손님이 아니라 친동생처럼 대해준다. 물론 여러 손님 중 나에게 특별히 더 잘해주는지 어떤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나는 누나가 가족처럼 느껴지는 게 사실이다. 그래서 경희네를 가면 늘 즐겁다. 그리고 무엇보다 음식이 맛깔스럽다. 기본으로 나오는 밑반찬도 그 맛이 예사롭지 않다. 큰 욕심도 없고 손님을 가족처럼 대해주는 경희네가 잘 됐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