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재가 준 씨앗ㅣ종일 비내리다
얼마 전에 혁재가 준 이름 모를 화초의 까만 씨앗에서 하얗고 말간 싹이 실처럼 나왔다. 대견했다. 그냥 버려졌으면 먼지와 더불어 삭아버렸거나 비둘기 등속의 새 먹이가 되었을 쌀 한 톨 크기의 씨앗이 싹을 내민 것이다. 불면 날아갈 그 조그만 알갱이 안에 생명이 숨 쉬고 있었다는 걸 생각하면 신비한 생각이 들면서 사소한 사물 하나도 허투루 대해서는 안 되겠다는 마음이 든다. 그것이 자라서 화초가 되고 화초는 다시 씨앗을 만들고 그 씨앗은 또 화초가 되는 생명의 무한반복, 그렇다면 작은 알갱이 속에는 영겁의 시간이 들어 있고 한 우주가 들어 있는 셈이다. 물과 흙과 빛이 키우는 무한의 시간, 생의 연결고리, 신비하다.
무슨 비가 종일 장맛비처럼 내린담. 양평으로 놀러 간 혁재는 이렇게 종일 비 내리는 날, 또 얼마나 진하게 젖었을 것인가. 조구 형은 빗물이 비끼는 작업실 창문을 바라보며 홀로 쓸쓸하게 막걸리를 마시고 계신 건 아닌지. 오늘은 박영근 형의 15주기 추모식이 열린 날인데, 형은 빗속에서도 이곳을 다녀가셨을까. 잿빛 시비(詩碑) 위에 쌓인 먼지 더께는 빗물에 씻겨 흘러내리고, 일행들이 놓아둔 막걸리 한 병과 화사한 꽃다발도 누군가를 기다리듯 제자리에서 묵묵히 비를 견디고 있을 텐데. 종일 비 내리니 생각도 널을 뛴다. 여러 술자리가 있었고 서너 통의 전화가 있었지만, 종일 집에 있었다. 젖은 빨래처럼 마음이 무거워져서 기분 전환 겸 일본 청소년 영화 <청하(靑夏)>를 보았다. 10대들의 풋풋한, 그러나 뻔한 연애담이자 성장 영화였지만, 영화 속 배경이 된 ‘우에코’의 풍광이 너무 아름다워 잠시 마음을 빼앗겼다. 비 때문인가, 가벼운 청소년 영화 한 편에도 마음이 죽처럼 풀어졌다. 기분이 많이 좋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