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개자 황사가 몰려오다ㅣ혁재가 다녀가다
비는 오전에 이내 갰다. 초여름 같던 날씨가 아침에는 초가을처럼 소슬했다. 비가 왔으니 대기질이 좋아지리라 기대했으나 심한 황사가 몰려왔다. 전생에 어마어마한 업적을 쌓아 놓지 않았다면 맑은 날씨와 청정한 공기가 사나흘 계속되기를 꿈꾸는 것은 불가능하다.
봄날은 그 자체로 아름다운 시간이다 보니 시샘하는 것들이 한둘이 아니다. 비와 바람은 꽃들을 시샘하고 먼지와 바이러스는 꽃을 보고 웃는 사람들을 시샘한다. 비가 아니면 꽃과 나무는 어떻게 양분을 취할 것이며 바람이 아니라면 수많은 꽃씨를 누가 날려줄 것인가. 결국 자신들이 꽃과 나무를 깨우고 보듬고 키워주었으면서도 어느 순간 일제히 피어난 꽃들의 광휘(光輝)는 왜 그리 샘을 내는 것인지 알다가도 모르겠다. 비와 바람이 몰려왔다 돌아간 자리마다 바닥에 뒹굴다 발에 밟히는 떨어진 꽃들, 처연하다.
제 나라 먼지야 그렇다 하더라도 남의 나라 먼지가 이렇듯 예의 없게 남의 집 안방까지 치고 들어와 은밀한 살림까지 위협하고 있는 일은 또 얼마나 황당한 업인가. 바이러스와 황사와 미세먼지로 인해 나의 삶의 질은 형편없어졌다. 산책과 산행을 좋아하는 나에게 유무형의 창살을 만들어 원치 않는, 도시의 수인(囚人)을 만들어 놓았다. 범인(凡人)의 소박한 행복을 짓밟는 것은 잔인한 일이다.
오염된 환경과 그 역습으로써의 재앙을 상대하는 데도 빈부 격차가 있다는 걸 확인하는 일은 서글프다. 환경은 자본가와 부유층이 훨씬 더 오염시키는데도 그로 인한 피해는 서민과 하층민들이 고스란히 감당해야 한다. 불합리하지만 그것이 현실이다. 평범한 사람들이 노력해서 개선한 환경에 자본가와 부유층은 항상 무임승차 한다. 혁명이 필요하다. 하지만 혁명은 쉽지 않다. 범인(凡人)인 나는 어느 봄날, 봄을 봄답게 느낄 수 없게 만든 먼지에 화가 나고 바이러스에 분노하지만, 달라지는 건 없다. 그래서 쓸쓸하다. 창문 너머로 먼지에 싸인 도시가 개미지옥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 같은 환상을 본다.
모처럼 모든 보좌관이 함께 점심을 했다. 식사를 마치고 구월우체국에 볼일이 있는 박 보좌관(이하 박 보)을 따라 모두가 함께 우체국을 향했다. 소풍 가는 학생처럼 유쾌하게 수다 떨며 공원을 가로질러 함께 갔다. 볼일을 마친 박 보는 슈퍼에 들러 나에게 담배를 사줬다. 일행들에게는 아이스크림을 사줬으며 로또복권 8게임(8천 원)을 구매해 두 게임씩 나눠줬다. “당첨되면 모르는 체하기 없기입니다”라고 너스레를 떨면서 우리는 메로나를 할짝거리며 웃고 또 웃었다. 황사 때문에 나빠진 기분이 웃다 보니 좀 풀렸다. 구월우체국에서 중앙공원을 가로질러 오면서 모두가 아이처럼 깔깔대며 웃었다. 홍어를 먹게 된 각각의 내력을 이야기할 때쯤 청사에 도착했다.
오후 혁재는 남동희망공간 텃밭에서 상추를 따며 막걸리를 마시고 있다며 연락을 해왔다. 옥상에서 담배를 피우며 혁재 소식이 궁금해 전화를 해봐야겠다고 마음을 먹고 있었는데 사무실로 내려오자마자 혁재로부터 전화가 걸려온 것이다. 이심전심! 우리는 좀처럼 술 마시자는 전화를 먼저 걸지 않는다. 갈매기에 가면 대개는 만날 수 있기 때문인데, 최근에는 내가 갈매기 가는 횟수가 뜸해져서 본 지가 오래 됐다. 오늘은 왠일인지 혁재가 먼저 "형, 안 바쁘시면 갈매기에 들르세요."라고 대놓고 말을 했는데, 그건 정말 낯선 일이다. 할 말이 있거나 뭔가 전해줄 물건이 있을 때가 아니면 드문 일이다. 요즘 코로나 특별방역기간이라서 약속도 없었고, 게다가 혁재와는 정말 오랜만에 만나는 거라서 5시쯤에 사무실을 나와 갈매기에 들렀다. 만나자마자 종우 형은 월요일에 왜 안 왔느냐고 취조하듯 물었는데, 요즘 컨디션도 그렇고 코로나 상황도 예사롭지 않아 못 왔다고 했더니, 어제는 조구 형과 은준이, 정균이, 혁재 등 오랜만에 많은 사람들이 들렀다는 말을 전해주었다. 조구 형의 안부만 물어 봤다. 잘 지내시는 것 같아 다행이었다. 은준이는 외로운지 자주 전화를 해서 길게 통화하곤 했기 때문에 대체적인 안부는 알고 있었고, 정균이의 소식은 들은 바 없다. 요즘 뭔 프로젝트를 진행했다고 하긴 하는데, 워낙 특이한 친구라서 뭘 하고 지내는지 정확하게는 알 수가 없다. 어쨌든 내가 없어도 모두들 있는 자리에서 건강하게 잘 지내고들 있는 모양이다. 막걸리 5병을 혁재와 나눠 마시고 함께 집으로 왔다. 생각과는 달리 혁재는 집에서 소주 세 잔만 마셨다. 그리고 일찍 돌아갔다. 아마 내가 피곤해보였기 때문일 것이다. 가기 전 뒷정리도 완벽할 정도로 깨끗하게 해놓고 갔다. 아름다운 친구다.